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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시] 고방
백석(1912∼1996) 낡은 질동이에는 갈 줄 모르는 늙은 집난이같이 송구떡이 오래도록 남어 있었다 오지항아리에는 삼춘이 밥보다 좋아하는 찹쌀탁주가 있어서 삼춘의 임매를 내어가며 나와 사촌은 시큼털털한 술을 잘도 채어
2011-12-29 18:11
[아침의 시]소금창고
이문재(1959~ )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
2011-12-25 18:58
[아침의 시] 사양(斜陽)의 가족사진을 찍다
고형렬(1954∼ ) 날개들 떠나기 시작했다 수돗가에서 두 철 까맣게 탄 도채장이들 분(盆)째 거실로 들인 남향의 오후 자 사진을 찍자, 저 멀어지는 빛으로. 이 시대의 시인은 없지만 우리끼리 시인이다 시인들
2011-12-22 17:39
[아침의 시] 거짓말을 타전하다
안현미 (1972~ )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
2011-12-18 17:58
[아침의 시] 달의 공장
이기인(1967∼ ) 공장 밖으로 심부름을 나온 달빛 심부름을 나온 바람, 심부름을 나온 소녀가 슈퍼에서 쪼글쪼글한 귤을 한 봉지 산다 슈퍼 주인 할아버지가 자기 방식으로 귤을 센다 늘어진 전깃줄에서 나온
2011-12-15 17:59
[아침의 시] 세신목욕탕
박미산 (1954∼ ) 허리 굽은 그녀가 탕 안으로 들어온다 자글자글 물주름이 인다 목만 내밀고 있던 여자가 묻는다 몇 살이슈? 여든일곱이유 난 아흔둘이여 잘 익은 살갗을 열어젖히며 목청을
2011-12-11 17:59
[아침의 시]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1946∼ )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
2011-12-08 17:27
[아침의 시] 북치는 소년
김종삼 (1921~1984)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세 개의 연이 모두 ‘∼처럼’으로 끝났
2011-12-04 17:44
[아침의 시] 말
서정춘(1941∼ ) 말이 달린다 다리다리 다리다리 말이 달린다 디귿리을 디귿리을 말이 달린다 ㄷㄹㄷㄹ 말의 몸통과 다리가 두 행으로 구분돼 달리고 있다. 말을 받쳐주는 다리가 디귿리을로 변주
2011-12-01 17:46
[아침의 시] 서해
김홍성 (1954~ ) 김장 배추는 소금에 절고 젓국 고는 아낙은 싸락눈에 전다 서해 밀물 위에 서서 돌아오는 어부여 오늘 밤만은 먼저 잠들지 말라 김홍성 시인에게 세상은 소풍 가는 곳이다. 삶을 소풍 가는 것처럼
2011-11-27 17:43
[아침의 시] 국광(國光)과 정전(停電)
김정환(1954∼ ) 어릴 적 국광 껍질 정말 타개졌는데 ‘타개지다’라는 말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생애의 껍질로 들어섰다. 저물녘 아니 부르는 소리 들렸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어두워지는, 한, 오십년 전 골목, 어
2011-11-24 17:48
[아침의 시] 남산, 11월
황인숙 (1958~ ) 단풍 든 나무의 겨드랑이에 햇빛이 있다. 왼편, 오른편, 햇빛은 단풍 든 나무의 앞에 있고 뒤에도 있다 우듬지에 있고 가슴께에 있고 뿌리께에 있다 단풍 든 나무의 안과 밖, 이파리들, 속이파리,
2011-11-20 17:50
[아침의 시] 재개발지구
김병호(1971∼ ) 노인을 붙잡아놓고 길자는 국수를 맙니다 노독이 뿔처럼 여문 저녁 기슭에 눈이 내립니다 국수 한 그릇을 비우는 동안 노인은 고개를 한 번 들지 않습니다 노인이 슬그머니 놓고 간 껌을
2011-11-17 17:54
[아침의 시]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최승자 (1952∼ ) 겨울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 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
2011-11-13 18:01
[아침의 시] 사랑은 ㅇ을 타고
김승희(1952∼ ) 사랑은 움직인다 사랑이 동그란 바퀴를 타고 있기 때문에,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일, 사람에서 ㅁ을 깎아 ㅇ을 만들어서 .....ㅇ....ㅇ....ㅇ......ㅇ......ㅇ...... 동그란 바퀴는 구르고 움직이며
2011-11-10 17:55
[아침의 시] 밤의 향기
김영승 (1958∼ ) 이 향기 이 비 쏟아지기 전날 밤의 이 향기/ 이 향기는 나는 죽어 귀신이 된다면 잠깐 이런 향기리라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자판기 불빛에다 대고 이 글을 쓴다 오늘밤엔/ 아무도 없어/ 좋다
2011-11-06 17:52
[아침의 시] 진달래
윤제림(1960∼ ) 진달래는 우두커니 한 자리에서 피지 않는다 나 어려서, 양평 용문산 진달래가 여주군 점동면 강마을까지 쫓아오면서 피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차멀미 때문에 평생 버스 한번 못 타보고 딸네 집까지
2011-11-03 17:47
[아침의 시] 성난 돼지감자
원구식 (1955~) 나는 걸신들린 여우처럼 산비탈에서 야생의 돼지감자를 캐먹는다. 먹으면 혀가 아리고, 열이 나고, 몸이 가려운 돼지감자. 독을 품은 돼지감자. 살아남기 위해선 누구든, 야생의 돼지감자처럼 자신의
2011-10-30 17:50
[아침의 시] 먼지 아버지
이경림(1947∼ )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먼지투성이 방석을 풀썩거리니까 그는 죽은 아버지를 왜 자꾸 들썩거리냐고 핀잔을 준다 아버지는 나와 함께 핀잔을 받고도 잠잠하시다 죽음은 괄괄하던 성정(性情)을 잠잠하게
2011-10-27 17:34
[아침의 시] 사랑법
강은교 (1946~ )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
2011-10-23 17:37
[아침의 시] 햇볕 한 장
손택수(1970∼ ) 이 치운 날 돌돌 말아 어느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장판인가 사내가 앉는 곳엔 늘 엉덩이 등허리 뜨뜻하게 지질 수 있는 햇볕 한 장이 있다 햇볕이 그를 따라다니는 것일까 그가 햇볕을 잘 접어서 때 묻은
2011-10-20 17:39
[아침의 시] 오늘, 쉰이 되었다
이면우 (1951~ ) 서른 전, 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리고 만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도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가 속맘으로 낼, 모레쯤 화해
2011-10-1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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