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바이블시론-임성빈] 과학과 신앙, 소통과 협력

입력 2017-09-28 17:32
[바이블시론-임성빈] 과학과 신앙, 소통과 협력 기사의 사진
과연 과학과 신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폴레옹에게 “전하, 저에게는 ‘신’이란 가설은 이제 필요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던 라플라스와 같은 계몽주의적 과학자들에게 신앙이란 과학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증명 가능성만을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좁은 의미의 이성에 집착하고 있던 그들일지라도 윤리는 여전히 필요했고, 그 윤리 너머엔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이 없다는 이야기에 열중하던 그 계몽주의자들도 하녀가 들어오자 목소리를 낮추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누었다고 한다. “쉿! 저 하녀 앞에서는 절대로 신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되네. 그렇게 되면 하녀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에게 충성을 하지 않을 걸세”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 하녀들도 계몽주의자들이 나눈 이야기를 알게 되는, 이른바 세속화 시대가 도래했다. 과연 신에 대한 전제, 즉 신앙 없이도 사회 기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확신 위에 전개되는 세속화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시대에서 윤리의 기초를 어디에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세속화 시대의 생명과학 안에서도 인류 공동체가 아래와 같은 생명윤리 원칙에 합의하고 있다는 점은 그런 점에서 흥미롭고 어떤 안도감을 준다. 그 윤리 원칙의 첫째는 비악의성(non-maleficence)이다. 이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해악을 끼치는 결과가 예상될 때 과학적 연구는 중단돼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선의(beneficence)라는 원칙이다. 이것은 특정한 연구는 (고등동물을 포함해) 인간 공동체에 유익을 주려는 선한 의도에서 착수돼야 한다.

세 번째는 만약 연구 대상이 사람일 경우 그들의 인권과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율성(autonomy)의 원칙이다. 효율성과 편리성만을 보고 과학자가 독재자 역할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는 정의(justice)의 원칙이다. 과학자의 연구는 특정 계층이 아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윤리의 원칙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할 수 있는 것은 한다’는 과학적 태도와 ‘도움이 되는 것을 해야 한다’는 윤리적 태도는 갈등 관계에 있을 때가 많다. 과학적 관점에 함몰되면 윤리적 태도는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한다’는 태도는 언제나 윤리 앞에서 점검받아야 한다. 과학이 돈과 힘이 되는 세상에서 경제 이익의 논리, 과학적 성취 그 자체, 인류에게 도움이 돼야 하는 것 등과 같은 이유 속에서 과학자 집단은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것은 과학적 능력 이전에 갖추어야 할 어떤 관점을 각자에게 요청한다. 이때 작은 범위의 이웃보다는 더욱 많은 이웃을 생각할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작은 세계보다는 눈에는 안 보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더욱 큰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각자의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토마스 쿤은 이것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렇기에 신앙은 결코 과학과 관계없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과학은 나름의 근원적 패러다임, 즉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것은 과학자의 윤리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책임 있는 과학자는 책임 있는 가치관, 즉 신앙을 소유한 사람에게서 더욱 기대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앙과 과학이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교회 안팎의 풍조를 경계하면서 신앙의 자리가 과학의 자리로, 책임적 윤리의 자리로 이어지도록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이제 한국교회가 과학의 영역으로 부름받은 제사장들을 더욱 많이 배출하고, 그들과의 협력을 통한 하나님 나라 실현에 더욱 힘을 모아 노력할 것을 소망한다.

임성빈 장로회신학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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