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재서 (5) 점자책 읽으며 밤새 독서삼매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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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 실명 때문에 인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나의 맹학교 생활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됐고 친구들과 곧잘 어울렸다. 점자로 읽는 독서는 느렸지만 점자책을 밤새도록 읽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카네기가 쓴 ‘인생의 길은 열리다’라는 책을 점자로 읽었는데 그 책은 많은 감명을 주었다. “언제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정말 나보다 어려운 처지의 친구들이 많아 보였다.

시각장애와 소아마비로 이중 장애를 겪는 친구들도 있었고 가족이 없어 늘 외로워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비록 가난하긴 하지만 부모님이 계시고 나를 끔찍이 아끼는 형, 누나와 여동생이 있지 않은가. 시각장애 외에 다른 장애를 가진 것도 아니고 세상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친구들도 많은데, 나는 그래도 15년 동안이나 보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좋은 것들이 내겐 많았다. 절망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대학 국문과에 진학해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시각장애인이면서 좋은 작품을 쓴 밀턴 같은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여건은 녹록지 않아 보였다. 꿈을 실현하기엔 아직 멀고 먼 일이었다.

서울맹학교는 실업계 학교였다. 시각장애인들의 직업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는 곳이었다. 안마나 지압, 물리 치료를 가르쳐 졸업 후 시각장애인들에게 특화된 직업인 안마사나 침술사 직업을 택하도록 했다. 배우는 과목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6년 동안 병리학 위생학 해부학 생리학 침술학 전기치료학 등 직업을 갖기 위한 의료 과목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학을 가기 위해 필요한 일반 과목은 전체 수업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따라서 대학에 진학하려면 따로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일반 과목을 공부할 점자 참고서가 없다는 것이었다. 요즘처럼 자원봉사자가 많지 않을 때여서 공부를 하며 함께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경제적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개인 과외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때 중학교 2학년에서 3명, 3학년에서 3명 모두 6명이 돈을 조금씩 걷어 ‘영어 실력 기초’라는 책을 점자로 만들기로 했다. 학교 직원 가운데 점자를 아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영어 수업을 잘 따라간 덕에 그 책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영어 실력은 하루하루 늘었다.

좀 더 영어 실력을 쌓고 싶었다. 당시 생각한 것이 학원에서 영어 강의를 듣는 것이었다. 학교 전체에서 대학 갈 준비를 시작한 사람은 나 외에도 2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가정이 부유한 편이어서 개인 지도도 받기도 하고 학원에도 다녔다. 하지만 내 형편에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할 뿐이었다. 한번은 친구를 따라 학원에 가 보았는데 선생님의 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학원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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