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재서 (7) 이름 모를 이들 도움 받으며 영어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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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칠 것 같지 않아 그냥 비를 맞으며 학원 문을 나섰다. 그런데 횡단보도가 문제였다. 차 소음인지 빗소리인지 분간이 안 돼 도무지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다들 그냥 가 버렸다.

한 시간가량 비를 맞고 서 있어야 했다. 온몸에 물이 줄줄 흘렀다. 쩔쩔매고 있는데 젊은 아가씨들이 재잘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앞이 보이지 않아 그러는데 횡단보도를 함께 건널 수 있으신지요?”

기다려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렇게 인정이 없을까 싶어 나도 모르게 “나쁜 계집애들, 그냥 가버리면 어떡해”라고 좀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랬더니 바로 앞에서 “우리 아직 여기 있어요. 함께 가요”라며 내게 팔을 내밀었다. 간 줄 알았는데 내 앞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욕을 한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아무튼 그들의 도움으로 그 비 오는 날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까지 해서 공부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 기숙사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돌멩이 같은 것에 걸려 넘어졌다. 툭툭 털고 일어서는데 “어디로 가세요?”라는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그녀는 비에 젖은 나에게 우산을 씌워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5년 전 상경해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일한다는 그녀와 학교까지 가는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시각장애인에 대해 신문에서 읽었다는 이야기, 선진국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훌륭하게 된 사람들이 많다는데 “실망하지 말라”는 격려까지 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학원 근처 건널목에서 사고를 당한 날도 비가 왔다, 건널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혼자 건너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쯤 건너다 버스에 눈 윗부분을 부닥쳐 쓰러지고 말았다. 안경이 깨졌다. 피도 많이 났지만 정작 버스는 그냥 가버렸다. 만약 1㎝만 몸이 앞으로 나갔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다행이었다.

마침 지나가는 다른 차가 없어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날 부축해주었다. 휴지와 손수건을 꺼내 피가 흐르는 이마에 대주며 지혈을 해주었다. 그리고 택시에 태워 학교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택시비도 내주었다,

나중에 감사함을 표시하려고 그를 찾았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중부시립병원 응급실에서 열두 바늘을 꿰맸는데 지금도 왼쪽 눈 위에 흉터가 남아 있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이나 울었다. 다친 데도 아팠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아파서였다.



다음 날에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다시 학원에 갔다.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면 이 모든 고생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중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기엔 너무도 힘든 날들이었지만 내 비전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하나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비전은 상상이고 꿈이지만 그것은 삶을 좌우한다고 난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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