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재서 (8) 배고픔보다 외로움이 더 큰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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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고향에선 우리 집뿐 아니라 대부분 가난했기에 가난이 그리 큰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게다가 부모님도 계셨으니 적어도 배고픔으로 괴로워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서울맹학교 생활은 달랐다. 가난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시절이었다. 먹을 게 별로 없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차츰 자신감을 회복해갔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늘 고통이었다. 서울맹학교는 국립이었기 때문에 전교생이 무료로 기숙사에서 먹고 잤다. 하지만 한창 자랄 나이라서 그런지 기숙사에서 주는 밥만으로는 허전한 속을 달랠 수 없었다.

밥이라고 해 봤자 보리가 가득 담긴 밥에 반찬 한두 가지가 전부였다. 반찬은 콩나물국, 콩장, 맨간장, 김치가 교대로 나오는 정도였다. 한 달에 한번 정도 쇠고깃국이 밥상에 오르기도 했지만 쇠고기는 한 점도 없고 고기 냄새만 살짝 나는 뭇국에 불과했다. 우리는 그 국을 소가 죽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하여 ‘황소무사통과탕’이라고 부르던 기억이 난다.

여유가 있는 학생들은 교내 매점이나 인근 식당에서 빵이나 외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내 주머니는 늘 돈이 궁했다. 가끔 식당 유리창을 닦아주며 식당 아줌마에게 누룽지를 얻어먹기도 하고 다른 친구들과 식당에 몰래 들어가 남은 밥을 먹다가 들켜 혼이 난 적도 있었다.

점자 종이가 떨어져도 도무지 살 형편이 안 됐다. 궁여지책으로 날짜 지난 달력 종이를 잘라 쓰기도 하고 좀 두꺼운 종이로 만든 헌 잡지책을 싼 값에 사서 사용하기도 했다. 화장품 회사에서 나오는 잡지를 싼 값으로 사거나 얻어 점자 용지로 많이 사용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점자를 한 번 쓰고 버린 것을 주워 물을 묻혀 발로 밟아 말린 뒤 사용했다. 그러나 아무리 꼭꼭 밟아도 오톨도톨한 점자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새로 쓴 부분과 헷갈려 읽기가 불편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래도 괜찮았다. 더 큰 문제는 사람이 그리운 것이었다. 기숙사에는 시각장애인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외딴 섬에 유배된 것처럼 늘 외롭고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다른 친구들은 가족이나 친척들이 맛있는 음식을 싸 들고 찾아오곤 했다. 하지만 나는 6년 재학 동안 한번도 그런 경험이 없었다. 밥 한 그릇 사주는 사람도 없었다. 멀리 있는 가족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서울에 있으면서 찾지 않는 친척이나 고향 친구들은 솔직히 서운했다. 어떤 책에서 읽은 ‘번영은 친구를 만들고 역경은 그 친구를 시험한다’는 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시절이었다.

돈이 무엇인지? 정말 돈이 뭔데 이런 쓰라린 고통을 주는 것인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겐 교복도 하나, 신발도 하나, 속옷도 한 벌이었다.

한 달에 세탁비로 200원을 내면서도 내가 빨아 입지 않으면 안 됐다. 한 번 빨래를 맡기면 5일씩 걸리니 그 사이에 갈아입을 옷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양말을 찾다 학교 수업에 지각을 해 야단을 맞은 적도 있다.

형에게 편지를 써 놓았음에도 우표값이 없어 부치지 못했다. 이런 모든 것이 내겐 고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몸마저 수척해졌다. 어린 나이에 다 늙은 노인처럼 가죽만 남았다. 교실에 앉아 있으면 기력이 없어 눕고만 싶었다. 건강해야 하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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