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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식물이야기] 발소리 따라 자라는 나무

[고규홍의 식물이야기] 발소리 따라 자라는 나무 기사의 사진

감나무의 빨간 감이 눈에 들어온다. 감나무는 평소에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흔하다. 감 익는 이즈음에야 비로소 도드라져 보일 뿐이다. 까닭에 감이 열리지 않는 감나무는 천대받기 십상이다.

우리나라에 살아 있는 감나무 가운데 가장 큰 경남 의령 백곡리 감나무가 그랬다. 오래 전 이 나무를 처음 찾아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저깟 감나무는 뭐 하러 찾아왔느냐’는 핀잔부터 던졌다. 몇 년째 감이 열리지 않아서였다.

450년 전에 이 자리에 뿌리내린 백곡리 감나무는 28미터의 크기로 자라면서 여느 감나무와 다른 기품을 갖췄다. 생식 능력을 잃을 만큼 지나온 오랜 세월의 풍상이 야속했지만, 보면 볼수록 백곡리 감나무는 장하고 아름다웠다.

더 오래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 나무의 존재를 이곳저곳에 알리던 중, 텔레비전 방송의 PD 한 분이 이 감나무의 한해살이를 영상으로 기록하겠다고 나섰다. 감나무는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며 열매를 맺는다며 그 PD는 감이 열리지 않는 결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겨울에 시작된 촬영은 이듬해 내내 계속됐다. 시큰둥하던 마을 사람들도 그이의 정성에 감복한 나머지, 언제 나무를 천대했느냐 싶을 만큼 정성을 들였다. 나무 주변에 늘어놓았던 농기구와 비료 포대를 말끔히 치우고 청소부터 했다. 큰 가지에는 그네를 매고 아이들을 태우기도 했다. 심지어 이 감나무와 관련해 옛 조상들이 남긴 기록들을 찾아내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마을 사람들이 찾아오자 나무도 흥겨워 즐거운 표정으로 한 해를 보냈다.

봄부터 가을까지 나무가 보여준 천변만화를 담은 영상이 차츰 마무리되던 그해 가을, 그이로부터 연락이 왔다. 감이 열렸다는 이야기다. 물론 여느 감나무처럼 주렁주렁 열린 것은 아니고, 조그마한 열매 두엇이 나뭇가지 꼭대기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놀라웠다.

감나무는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한 사람의 정성이 증명해 보인 결과다.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익어가는 벼이삭처럼 감나무도 사람의 정성에 따라 열매를 맺는 게 분명하다.

감나무뿐이겠는가. 세상의 모든 나무, 모든 자연은 사람과 함께 사람의 정성을 거름으로 더 풍성히 자라나게 마련이다.

천리포수목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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