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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기독신여성 3인 삶·신앙 비교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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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 계몽운동가 박인덕(1897∼1980), 교육가 김활란(1899∼1970)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1920년대 자유연애 옹호론과 자유연애 비판론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간 기독교 신여성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기독교적 성장 배경, 종교적 회심을 통한 여성 주체 의식의 형성, 유교적 가부장주의가 상대적으로 약한 가족 배경, 해외 유학 경험, 교육 사업 열망 등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김활란은 이화학당 재학 시절 철야기도를 하다가 회심했으며, 박인덕은 어린 시절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결혼 직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나혜석은 자전적 소설 ‘경희’ 통해 기독교인임을 자랑스럽게 고백했다. 하지만 성, 사랑, 결혼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매우 달랐다.

이숙진 성공회대 초빙교수가 지난 7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심포지엄에서 이들 기독교 신여성 3인의 삶을 조명했다.

김활란은 자유연애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당시 기독교 성 윤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열린 사고와 태도를 취하면서 독신의 길을 선택했다. 이 교수는 “‘윤치호 일기’를 보면 (김활란이) 기독교 남성 엘리트들의 파벌 싸움에서 성적 추문의 당사자로 지목 당해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면서 “그러나 그의 삶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늘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됐고, ‘최초 여박사’ ‘최초 여교장’ ‘최초 여총장’ ‘최초 세계여학사회장’ 등 상징 아이콘이 됐다는 설명이다.

반면 박인덕은 결혼과 이혼을 주체적으로 결정했다. 이 교수는 “김활란의 선배 박인덕은 이화학당 시절부터 얼굴 곱고 음악과 연설 잘하기로 이름 높았지만 결혼과 이혼으로 인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며 기독교 공동체로부터 두 번 추방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박인덕은 ‘전문직 여성클럽’ ‘농촌 여성과 아이를 위한 공동체’ ‘숙화의숙’ 등을 만들었지만 한국 기독교 공동체에서 존재감이 약한 국외자였다”고 말했다.

한편 행려병자로 최후를 맞이한 나혜석은 가부장적 윤리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광수와의 연애 사건 , 김우영과의 결혼, 이혼 고백장 발표, 고소 등 그의 굴곡 있는 삶은 흥밋거리로 회자되거나 가부장적 윤리를 희롱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이 교수는 “기존 도덕과 정조 관념 해체 시도는 그를 급진적 여성해방론자로 몰고, 더 이상 기독교인으로 머물지 못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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