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한승주] 또 다른 베를린 장벽 기사의 사진

#환희



하이라이트는 ‘도미노 쓰러뜨리기’였다. 옛 베를린 장벽을 상징하는 커다란 도미노가 하나 둘 쓰러져 멀리 퍼져나가자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환호했다. 벅찬 감격에 눈물을 쏟는 이들도 있었다. 꼭 20년 전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상황이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포츠담광장에 이르는 1.5㎞의 거리에 줄지어 있던 도미노 1000개가 쓰러지는 데 40분이나 걸렸다. 줄줄이 넘어지던 도미노 행렬이 20주년 기념식이 열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놓인 마지막 도미노에 이르자 수천 발의 폭죽이 터졌다. 살벌한 긴장이 흐르던 곳이 축제의 장이 된 것이다.

기온이 뚝 떨어진 초겨울,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지만 광장의 열기는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연단에 오른 각국 정상들을 빼곤 광장에 모인 수십만 명 가운데 우산을 쓴 이는 거의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년. 경제는 좋아졌다. 공산주의 체제 아래 가난하던 시절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빵 한 조각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길게 서야했던 모습은 사라졌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좋아진 것은 아니다. 빈부격차는 심해졌고, 동유럽 국가 지도층의 부정부패는 심해져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동독은 서독에 비해 실업률이 2배가 높고, 독일과 국경을 같이 하던 동유럽국가에선 공산주의가 슬며시 세를 확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이렇게 광장에 모여 가슴 벅차게 이 날을 기념했던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영상으로 보낸 축사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처럼 독재에 대한 더 명백한 거부이자 자유에 대한 더 강한 의지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 쟁취하고 지켜내는 것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베를린 장벽이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만큼 뜨겁고 힘센 것은 없다. 굳건하게만 보이던 베를린 장벽도 결국 어둠 속에서도 꿈을 성취하려는 의지에 무너지고 말았다.

#슬픔

독일인들이 환호성을 지른 같은 시각, 안규철(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용선(서울대 미대) 교수의 심정은 착잡했다. 그들은 이번 도미노 작업에 참여한 한국인 3명 중 두 명으로 이날 행사에 초대받아 베를린에 왔다.

행사를 준비한 베를린 시는 안 교수를 공식행사 중 불러 짤막한 대담을 가졌다. 분단국 출신 예술가에게 분단과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만 세계에는 여전히 많은 장벽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분단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인 그에게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이런 상황은 매우 부럽고 한편으로는 슬픈 것이었다.

동서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지구촌 곳곳에는 아직도 종교적·이념적인 이유로 나누어 진 장벽이 많다. 신·구교 지역을 분리하는 북아일랜드의 평화선 장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분리하는 이스라엘의 서안 분리 장벽, 불법이민자를 막기 위한 미국 멕시코 국경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철조망과 지뢰까지 매설돼 한반도를 가르는 비무장지대(DMZ)가 가장 삭막하다.

10일 낮 서해에서 남북 해군이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럽 27개국은 다음 달부터 정치적으로 한 국가가 된다. 한반도는 여전히 남북 대치상황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독일이 축포를 쏘아 올릴 때 우리는 총포를 쏘았다. 20년 전 그때처럼 또 다른 베를린 장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한승주 국제부 차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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