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그룹 ‘동방신기’ 전속계약 효력정지 첫 가처분 승소 임상혁 변호사 기사의 사진

연예계 ‘노예계약’ 폐지 이제 장동건·배용준 나서라

-동방신기를 알고 있었나요?

“(웃음) 이거 보도되면 안 되는데… 얼굴을 몰랐어요. 찾아온다기에 오전 내내 뮤직비디오랑 사진을 컴퓨터에 띄워놓고 얼굴과 이름을 외웠죠. 최강창민과 영웅재중이 끝까지 헷갈렸는데 다행히(?) 최강창민이 안 왔더군요.”

영웅재중 시아준수 믹키유천 등 동방신기 멤버 3명을 대리해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낸 임상혁(40·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지난달 25일, “동방신기 얘기는 묻지 마라”며 손사래 치던 그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10월 27일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는 이 가처분신청을 일부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SM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동방신기 멤버들의 경제적 자유와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했다. 계약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무효로 볼 여지가 상당하다”고 했다. 말이 ‘일부 인용’이지, 사실상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 SM의 패소였다.

연예계는 재판부 결정보다 임 변호사가 택한 ‘가처분’이란 방식이 먹혔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가처분은 정식 재판에서 다투면 때를 놓치는 상황일 때 신청할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며칠 앞두고 박정희 전 대통령 유족이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한 게 좋은 예다.

-왜 가처분을 택한 거죠?

“연예인 계약 분쟁은 해방 후 60년간 대법원 판례가 없어요. 정식 재판이 대법원까지 가려면 2~3년 걸리는데 그동안 연예인은 활동 못하고 잊힙니다. 다들 소송 냈다가 중간에 포기한 거죠. 동방신기도 정식재판 했으면 연예인 생명 끝났을지 몰라요.”

임 변호사가 가처분신청을 내자 법조계에선 ‘세종이 실수했다’고들 했다.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지려면 두 가지를 인정받아야 했다. ①계약이 무효에 해당한다는 점. ②정식 재판에 앞서 가처분을 해야 할 만큼 시급한 문제라는 점. 지금까지 연예인 계약 분쟁은 ‘시급성이 없다’는 게 통설이었다.

“우린 이 건이 시급한 문제라고 주장했어요. 동방신기 같은 아이돌 스타는 수명이 짧아 2~3년 소송하면 연예인 생명이 끝난다는 주장을 재판부가 받아들인 거죠.”

임 변호사 역시 처음엔 가처분을 생각지 못했다. “처음 상담할 땐 ‘계약무효 판결은 받을 수 있다. 다만, 한동안 활동을 못할 수 있다’고 알려줬어요. 2명이 참여하지 않은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겁니다. 차후 법률 검토를 하면서 가처분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SM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나요?

“여러 방법이 있어요. 이의신청 또는 항고를 내거나, 우리에게 ‘빨리 본안 소송 제기하라’라는 제소명령신청을 내는 거죠. 계약이 유효하다는 본안 소송을 제기해도 됩니다. 그런데 아직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처분을 통해 원하는 걸 이뤘어요. 계약을 정지시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수익금을 정산하려면 정식 재판에서 다퉈야겠지만 그건 급한 게 아니죠.”

-이제 연예인들이 가처분 신청을 많이 이용하겠군요?

“전속계약무효소송의 새로운 해결 방안을 제시한 셈이죠.”

연예기획사들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계약이 불합리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가처분을 통해 신속하게 법원의 판단을 받아볼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동방신기가 후배들에게 큰 선물을 준 거죠. 계약을 유지해도 좋고 해지해도 되니까, 옵션이 하나 더 생긴 거죠.”

연예계 불평등 계약 관행은 고질병일까. 고(故) 장자연 씨 사건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다시 잠잠해졌다.

-불평등한 계약이 빈발하는 이유가 뭔가요?

“시장 진입 장벽이 워낙 높아서 그렇죠. 대형 기획사를 통하지 않으면 아예 데뷔할 수 없는 구조에요. 전형적인 갑-을 관계죠. 을은 계약 내용을 따질 입장이 못 되고 오직 ‘도장을 찍느냐 마느냐’만 결정할 수 있어요. 계약서 조항도 굉장히 모호하죠.”

‘모든 방송출연 및 국내외 연예활동에 관한 권리는 SM에게 있다.’ SM과 동방신기의 계약서에 있는 문구다. 이런 포괄적인 문구는 분쟁을 유발한다. 이번 다툼에도 동방신기 3인의 화장품 회사 투자가 계약 위반이냐 아니냐하는 쟁점이 포함돼 있었다. SM측은 화장품 광고 수주 등에 영향을 끼치므로 위반이라는 입장. 동방신기 3인측은 “삼성전자 주식을 사는 것도 허락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모든 활동을 제약받아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노예계약”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동방신기라는 대스타조차 이런 계약을 참아왔던 이유가 뭘까요?

“연예 매니지먼트 산업은 가요계와 非가요계로 확연히 구분돼 있어요. 가요시장은 3대 메이저 회사가 독점하고 있죠. 이들은 트레이닝, 음반제작, 유통망 등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어요. 새 사업자가 진입하기 어려운 시장이에요. 독점 시장이죠. 동방신기조차 영원한 을이에요.”

-다른 분야는 어떤가요?

“非가요 분야는 경쟁시장이죠. 인맥만 있고 좋은 애들 데리고 있으면 기획사를 차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어요. 진입 장벽이 높지 않다는 뜻이죠. 당연히 기획사 힘이 상대적으로 약해요.”

배우들 세상에선 ‘에스컬레이팅 조항’을 계약에 포함시키는 관행이 존재한다고 했다. 신인이라도 인기를 얻으면 계약 조항을 상향 조정하는 걸 뜻한다.

-재발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

“파업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연예인들이 파업한다?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파업을 할 수 없다면 노조가 이익단체로 활동할 수 없고, 노조가 제 구실을 못하면 이런 불평등은 고칠 수 없다고 했다.

“미국 연예인들은 노동조합 즉, 길드로 뭉쳐 있어요. 제작자와 연기자 측이 단체협약을 맺고 있죠. 신인배우가 제작자와 계약할 때도 노조의 사인을 받아야 해요. 불공정한 계약을 하기 어렵죠.”

-연예인 파업이 정말 가능해요?

“미국 배우들이 파업했다는 얘기 못 들어봤어요?”

지난해 12월 미국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 SAG)은 파업 직전까지 갔다. 미국영화방송제작가연합(Alliance of Motion Picture and Television Producers, AMPTP)과 단체협약 협상이 결렬됐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약 1년간 끌어오던 단체협약 협상이 최종 마무리되면서 길었던 갈등이 겨우 봉합됐다.

-한국에서도 가능할까요?

“배용준, 장동건이 움직이면 돼요.” 그는 ‘조직된 개인’보다 ‘압도적인 1인’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예로 한국방송작가협회를 들었다.

“작가들이 방송사와 맺는 표준계약서는 갑과 을이 헷갈릴 만큼 공평해요. 김수현 작가가 나섰기 때문이죠.” 김 작가는 1987~1995년 작가협회 이사장 시절 집필 거부에 앞장서며 방송사와의 저작권 문제를 풀어냈다.

-한국 톱스타들이 자기 일도 아닌데 나설까요?

“미국은 U2나 리처드 기어 같은 톱스타들이 앞장섰어요. 우리는 스타급 중 누구도 총대를 안 메죠. 법원 결정이 나왔는데도 유명 연예인 중 누구도 동방신기 사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죠. 만약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톱스타들이 한마디씩 했을 거에요.”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간결한 답변이 돌아왔다.

-기획사 주장에도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 않나요?

“‘투자 위험 때문에 장기계약은 불가피하다’는 건 기획사들이 십수 년째 반복하는 논리죠. 하지만 법원은 한 번도 그 논리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법원의 판단은 늘 명확했다. 이번 사건에서도 재판부는 “투자위험성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장기의 계약기간과 과다한 손해배상액이 정당화된다고 볼 수 없다. 투자위험은 경영상 기법을 적용해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JYP엔터테인먼트는 지난달 새로운 전속계약서 양식을 만들었다. 이를 심사한 공정거래위원회는 표준전속계약서 기준을 충족하는 ‘공정 계약’이라며 합격점을 줬다. 연예매니지먼트 산업 전반을 개혁하는 법안도 문화부와 국회를 중심으로 준비되고 있다.

“전근대적 사업 방식을 반복하지 말아야 해요. 사람을 억압하고 쥐어짜서 이익을 내는 구조는 더 지속해선 안돼요.”

임 변호사는 연예인 전문 변호사 ‘2세대’로 꼽힌다. 연예인 개인보다 연예·문화 기업을 상대로 컨설팅과 소송을 한다는 의미에서다. 연예인 관련 사건 소송을 많이 맡았던 최정환 홍승기 변호사가 1세대로 불린다. 태평양과 세종이라는 메이저 로펌이 나섰다는 점 때문에라도 이번 사건은 연예 기획사와 연예인의 소송이 2세대 형으로 나아갔다는 의미를 갖는다. 소송이 진화한 만큼 연예계도 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까.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동방신기란 이름값 덕에 문제가 공론화됐고 연예인들이 가처분이란 새 ‘무기’를 손에 쥐었기 때문이죠.” 그의 행보에 연예계 안팎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