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동일 (2) 다섯살때 어머니 여의고 누나 품에 자라

[역경의 열매] 정동일 (2) 다섯살때 어머니 여의고 누나 품에 자라 기사의 사진

나는 1954년 구천동 계곡과 스키장으로 유명한 전북 무주 덕유산 자락에서 농사꾼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덕유산은 주봉인 향적봉(1614m)과 해발 1300m 안팎의 거대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30여㎞를 달린다. 향적봉 아래로 40㎞를 굽이굽이 달리는 구천동 계곡은 기암괴석과 원시림으로 장관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첩첩산중의 두메산골이었다.

덕이 많아 너그럽다는 덕유산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매정하고 가혹했다. 내가 다섯 살 때 3년 동안 병원에 누워계시던 어머니를 데려가셨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철없는 막내였지만 병석에 누워있던 어머니에게 응석 한번 실컷 부려볼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큰누님과 함께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읍내로 갔다. 버스 안에서 큰누님은 내 옷매무새를 정성스레 고쳐주면서 말했다. “동일아, 오늘 엄마 만나러 간다. 이렇게 활짝 웃어봐. 예쁘게 보여야지?” 큰 누님과 나는 병실에 들어섰다. 어머니는 힘없이 누워계셨다. 무척 아파보였다. 나는 “엄마!” 하고 병상으로 달려가 와락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 많이 아파? 죽으면 안돼, 나도 따라 죽을 거야!”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 따뜻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잠시 후 엄마와 헤어져 막 돌아서는데 들릴 듯 말 듯 힘없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동일이 씩씩하게 잘 자라야지. 동 일 아!….”

어머니는 따뜻한 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한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어서 가라고 손짓하셨다. 그날이 내 평생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어머니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닌데 내가 어머니를 버렸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막내를 잊지 못하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나는 영영 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누님의 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땐 사람들이 없는 곳까지 마구 달린다. 그리고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1년 중 제일 싫은 날이 있다. ‘어머니날’이다. 지금은 매년 5월 8일이 ‘어버이날’이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어머니날’이라고 했다. 그때는 어머니날에 아이들이 가슴에 카네이션 꽃을 달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어머니가 있는 아이는 빨간색 카네이션을, 엄마가 없는 아이는 하얀색 카네이션을 달게 했다. 난 늘 하얀색이었다.

“너 어머니 없구나!” 아이들은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다. 엄마 없는 게 무슨 죄라도 되는 듯 괜히 주눅 들고 눈물이 났다. 나중에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 난 어머니 없다! 왜?” 나는 아이들을 흘겨보다가 결국 티격태격 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다. 고아 아닌 고아로 업신여김을 당하며 울음을 삼켰다. “왜 하나님은 우리 어머니를 일찍 데려가셨을까?” 살짝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일꾼으로 키우시기 위해 일찍 시련과 고통을 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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