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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김기석] 얼음 운동회

[삶의 향기-김기석] 얼음 운동회 기사의 사진

초겨울 북한강을 따라 달리는 길이 호젓했다. 몸이 건강치 못해 약간의 불안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시골학교로 전학시킨 교우 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서울이 삶의 터전인 그들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고 싶다는 간절함이 그런 결정을 재촉했다. 사물에 대한 관찰력도 뛰어나고, 감수성도 예민한 아이였지만 경쟁체제로 돌입한 학교생활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엄마는 다소 지친 듯한 아이를 보면서 초조했다. ‘다른 아이들은 다 견뎌내는 일을 우리 아이는 왜 못 견디는가’ 속상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친 표정으로 돌아오곤 하는 아이를 보다가 문득 아이의 행복에 생각이 미쳤고, 저 살벌한 경쟁 분위기 가운데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자각이 들었다.

교우와 함께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둘러봤다. 학교는 북한강변의 조그마한 마을 한 쪽에 있었다. 한적한 운동장에는 테니스공으로 야구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땅바닥에 엎드려 뭔가를 들여다보는 아이들이 있었다. 과거 선생님들에게만 출입이 허용되었던 연단에서는 아이들이 팽이 돌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선생님과 학생들은 낯선 방문객들에게도 친절한 인사를 건네 왔다.

학교 한 바퀴를 다 돌고 바깥으로 나오다가 교장 선생님과 마주쳤다. 그는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차 한 잔 들고 가시라며 우리 일행을 교장실로 안내했다. 그는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것을 교육철학으로 삼고 있었다. 학부모와 교사들과 더불어 교육에 대한 꿈을 나누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표정은 따뜻하고 고요했다.

그의 꿈은 아이들에게 행복했던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사랑받고, 존중받았던 경험이야말로 한 존재의 일평생을 비추는 빛이 된다. 삶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살아갈 희망조차 사라질 때, 아름다운 기억은 때로 고향이 되고 성소가 되어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준다. 그는 학교에 나와 아이들의 얼굴만 보면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희미한 모습으로 각인된 아름다운 존재를 보아내고, 그를 호명하여 불러내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알기 때문이리라.

새해엔 마을 어르신들에게 빌린 밭에 아이들과 함께 다양한 농작물을 심을 예정이란다. 흙을 만지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아이들은 생명의 신비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경험할 수확의 기쁨, 이보다 더 큰 교육이 어디 있을까?

교장선생님은 전교생과 함께할 얼음 운동회 계획을 들려줬다. 이미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써레질을 하고 물을 가두어 두었다. 날이 차가워져 얼음이 얼기만 하면 된다. 운동장 한켠에 있는 창고에서는 벌써 학부모 한 분이 썰매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그의 귀에는 아마도 얼음 위를 지치며 내는 아이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아이들은 썰매도 타고, 팽이도 치고, 줄다리기도 하면서 즐기면 된다. 교사들은 군불을 지펴 아이들의 언 손과 발을 녹일 수 있게 하고, 학부모들은 차일 아래서 떡볶이도 만들고 국물이 시원한 어묵도 끓이고 참숯불 위에 가래떡도 구워 아이들의 군침을 돌게 할 것이다.

독일어에 ‘팔꿈치사회’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말이다. 규칙을 준수하는 듯싶지만 실제로는 다른 이들을 밀쳐내도록 가르치고 또 그런 가치관을 내면화하도록 만드는 세상은 디스토피아를 예비하고 있는 세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한 사람의 꿈은 수없이 많은 동심원을 일으켜 행복의 파장을 만들고 있다. 누군가에게 행복감과 자존감을 심어줄 생각에 가슴 설레는 사람을 본 기쁨에 이 겨울은 춥지 않을 것 같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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