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동일 (3) 어릴때 여읜 어머니 생각에 늘 외로워

[역경의 열매] 정동일 (3) 어릴때 여읜 어머니 생각에 늘 외로워 기사의 사진

나는 성장이 빠른 편이었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을 정도로 주위에서 인정받는 아이였다. 그렇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허전함과 외로움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부재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 채울 수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는 역시 어머니의 존재가 절대적이다.

소풍을 갈 때나 운동회 때에는 더욱 어머니 생각이 났다. 예전에는 이런 학교 행사 때면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싸와서는 먹었다. 그때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괜히 주눅이 들었고 속이 상했다.

“얘야, 너도 이리 와서 같이 먹자.”

친구의 어머니가 불러도 나는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마음이 아프고 쓰려 그날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날은 어머니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져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 가서 훌쩍훌쩍 울었다. 여느 아이들에게는 즐거웠을 소풍날이 나에겐 쓸쓸하고 외로운 날이었다.

가슴에 슬픔을 지닌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텔레비전 같은 데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금방 눈물이 쏟아진다. 어머니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런지 정에도 참 약하다. 그러나 어떤 악조건이나 역경 속에서도 부모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극복하려고 무진장 애썼다.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태어나고 자연스럽게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복 받은 삶이겠는가. 배고픔의 고통도 모를 것이고 배움에 대한 애끓는 갈망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배고팠던 시절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머니가 3년 동안 병상에 있는 동안 우리 집은 논 몇 마지가밖에 안 되는 빈농으로 전락했다.

가난해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아버지를 비롯해 형님과 누나 그리고 초등학생이던 나까지 온 집안 식구가 농사일에 매달렸다.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형들만큼 일을 했다. 그러나 기울어진 집안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끼니 때우기도 버거웠다. 보릿고개 때는 쑥을 뜯어서 밀가루를 조금 섞어 먹기도 했다. 채 익지도 않은 보리로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겨울에는 고구마와 김치가 주식이었다. 그렇게도 어려운 시절, 나는 아직 어려 철이 덜 들었던지 한때는 소를 돌보다가도 틈만 나면 요리조리 노는 데 정신을 쏟았다. 간혹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쳐다보면서 어머니 얼굴을 떠올려 보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마다 나는 한숨을 길게 쉬고는 “하나님 제발, 우리 엄마 얼굴 좀 보여주세요”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성당은 다소 가까웠고 교회는 멀었다. 성당은 15리(6㎞)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교회는 50리 밖에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나 유교를 믿었다. 훗날 미국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둘째누님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일아, 너도 사실은 모태신앙이다. 언젠가는 너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 어머니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병으로 누우시기 전까지 주일을 지켰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모두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 것을 깨닫기까지는 수십년이 걸렸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