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동일 (4) 야학마저 폐교… 멀어진 진학 꿈


나는 초등학교 때에 1등을 놓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투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일반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6㎞쯤 떨어진 성당에서 운영하는 야학에 다니라며 입학원서를 가져오셨다.

“동일아! 으떡하것냐, 집안 형편이 좋으면 중학교에 다녀야 쓰것지만, 낮엔 농사 좀 거들고 밤에 재건학교라도 다녀야 쓰것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비록 정규 학교는 아니지만 나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야학에 다녔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어머니께서 생전에 다녔던 성당이었다. 그러나 우리 식구는 성당에 나간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가족에게 성당에 다니라는 강요를 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인지 성당 야학은 왠지 어머니의 숨결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낯설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그나마 재건중학교도 2학년 1학기 때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서 폐교되었다. 결국 배움의 기쁨도 잠시, 나는 이제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참으로 암담했다. 검정고시를 봐서 중학교 학력을 인정받으려던 작은 꿈마저 사라졌다.

나는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농사에 매달렸다. 친구들이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에는 잠시 숲속에 들어가 숨기도 했다. 그래도 재건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검정고시를 봐서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도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서로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꿈이 사라지자 모든 것이 싫고 원망스러웠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의 소리가 나왔다.

그러다가 다시 마음을 잡았다. 혼자서 한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천자문을 시내에서 사 가지고 와서는 쓰고 읽는 연습을 부지런히 했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고 사서삼경을 외웠다. 명심보감도 읽었다. 그때 익힌 한자 실력은 지금까지 도움이 되고 있다.

1969년 열다섯 살이던 추석날 서울에서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친한 동네 형이 나를 찾아왔다.

“동일아, 계속 농사만 짓고 살 생각이냐? 내가 취직자리 알아 볼 테니 서울로 가자!”

“서울을 가자고요?”

“그래, 사람은 모름지기 기술을 배워야 밥은 굶지 않고 살 수가 있다. 세차장이나 정비공장 같은 데는 일자리가 있다.”

“…”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일단 지긋지긋한 시골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친척 형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있었다. 이왕이면 큰물에서 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님, 저도 서울로 갈래요.”

어머니의 죽음과 어쩔 수 없는 학업의 중단, 나는 가슴 속에 흐르는 슬픔을 뒤로 하고는 굳은 마음으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남들처럼 부푼 꿈을 안고 서울행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 지금까지의 삶은 내 스스로가 한 것이 아니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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