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용 칼럼] 빗나간 民願,民怨을 낳는다 기사의 사진

두 달 전 아파트에 배포된 전여옥(서울 영등포갑) 의원 의정보고서에서 눈길을 끈 내용은 ‘KTX 영등포역 정차’와 ‘신안산선 전철 도림사거리역 설치’였다.

연간 470만명이 이용하는 영등포역은 ‘KTX 정차’가 오랜 숙원이었다. 하지만 선로 용량이 부족한 데다 ‘광명역권이 죽는다’는 정치 논리에 막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런데 10월 7일 한국철도공사 국정감사에서 허준영 코레일 사장이 “정 안되면 출퇴근 시간에 한두 편이라도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한 것이다. 신안산선 도림역도 이 일대가 대중교통 사각지대이므로 주민 편의를 위해 당연히 요구할 만한 것이었다.

고속철, 전철 유치를 전 의원이 단번에 해결하는 것을 보면서 “전여옥, 과연 세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공신(功臣)이며 당 전략기획본부장이니 노조 파업을 제압한 뚝심의 허 사장도 전 의원 요구를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데 출퇴근 시간 1∼2편 정차라니, 정말 어려우면 차라리 안 세우고 말지, 모양새가 영 ‘코끼리에 비스킷’이란 느낌이다.

뜬금없이 전여옥 의원 드라이브가 생각이 난 것은 지난 주 꼬리를 물었던 ‘민원(民願)사태’ 때문이다.

“선심성 예산, 노동법, 고교선택제는 허무 개그. 정치인부터 바뀌어야”

국회 국토해양위 의원들은 4대강 예산안 강행 처리 와중에도 ‘지역구 챙기기’에 죽이 맞았다고 한다. 4대강 예산이 3조5000억원인데 여당 위원장부터 야당 의원들까지 끼워넣기한 지역구 선심성 예산이 무려 3조4800억원이나 됐다. 골고루 나눠먹은 것을 보면 여당의 강행 처리가 왜 쉬웠는지를 알 듯하다. 이 때문에 올해 2700억원이 배정됐던 노후 공공임대주택 리모델링 지원 예산과 432억원이 투입됐던 결식아동 급식 지원금이 내년엔 아예 빠졌다. 서민을 고통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지역구 도로 건설이 그렇게 급했나. 한나라당 지도부가 “묵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지만 과연 얼마나 삭감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나라당이 국회에 제출한 노동관계법 개정안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노사정 합의로 발표까지 했던 타임오프(time-off)제 ‘노조 전임자 근로시간 면제 범위’가 대폭 후퇴했다. 한국노총이 노동계에서 코너에 몰리게 되자 한나라당이 한국노총의 ‘민원’을 수용해 하나마나한 법안이 돼 버렸다. 임태희 노동부 장관이 뒤늦게 “노사정 합의 정신이 변질됐다”며 반발했다지만 마치 ‘허무 개그’를 보는 심정이다.

학생에게 학교선택권을 준다는 취지로 처음 도입된 ‘서울시 고교선택제’도 시행 보름을 앞두고 돌연 변경돼 큰 혼란을 빚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2단계 배정 방식(정원 40%)을 ‘2개 학교 중 무작위 추첨’에서 ‘교통편을 고려한 추첨’으로 골격을 바꿔 결국 집 근처 학교 가라는 것과 다름없게 됐다. 이러니 목동, 중계동처럼 특정 지역 민원에 굴복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힘이 작용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전체 학부모의 2∼3%에 불과한 선호학교 밀집 지역 민원 해소를 위해 97∼98%나 되는 타 지역 학부모의 원성을 유발한 셈이다.

빗나간 민원(民願)은 더 큰 민원(民怨)을 낳는다. 가까스로 골격만 짜 맞춘 합의를 밀실협상, 탁상행정, 지역이기주의로 순식간에 엉망으로 만들었다. 정책 결정 과정이 얼마나 자의적이며,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정치적 편의주의를 따르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막대한 사회적 진통과 비용을 치르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국가의 중차대한 정책들이 이처럼 이기심과 변덕에 좌우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3건 모두 원래의 취지대로 환원해야 한다.

정부는 내년 G20 정상회의 개최를 앞두고 ‘국격 높이기’에 시동을 걸었다. 반듯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비 대상에 시민의식도 포함시키겠다고 한다. 헛웃음이 나온다. 시민의식 정비에 앞서 ‘G20 정치인-관료 되기’ 캠페인부터 벌이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다.

이형용 수석논설위원 hy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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