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동일 (7) 제대 후 과일행상 하다 치킨점 열어

[역경의 열매] 정동일 (7) 제대 후 과일행상 하다 치킨점 열어 기사의 사진

스물다섯 살, 군생활을 잘 마치고 제대했다. 장군 운전병 경력 덕에 모 회사 사장 기사로 일하게 됐다. 그 회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1979년 결혼했다. 서울 신수동 방 한 칸짜리 셋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하루에 연탄 2장은 피워야 했지만 1장으로 버텼다. 얼마 후 기쁘게도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했다. 하지만 아내는 라면 1개를 반개씩 쪼개먹을 만큼 지독하게 알뜰했다.

그렇게 힘든 겨울을 나고 80년 봄, 우리는 신당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8월에 아이가 태어났다. 역시 이웃사촌이었다. 옆 방에 사시던 신일교회 권사님이 우리 집 일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도움을 주셨다. 그 땐 그분의 은혜를 몰랐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 교회에 나갈 여유가 없었다. 그분은 6년 전 우리 부부가 신일교회에 처음 나갔을 때 이광선 목사님과 함께 가장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이가 태어나자 앞으로의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동차 기술은 있었지만 직장생활보다는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 나는 왕십리 중앙시장에서 하루 500원에 리어카를 대여했다. 새벽에 시장에 나가 과일을 떼어다 팔았다.

“과일 사세요. 토마토 사세요!” 처음엔 모기 소리보다 작았지만 점차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나가시던 목사님이 “그렇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외치면 누가 당신의 과일을 사먹겠느냐, 자신 있게 목청껏 소리쳐야 팔린다”는 말씀을 듣고부터다. 그날 이후 내 목소리는 중구의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번져 나갔다. 폭염에도 혹한에도 장충단 고개를 넘어 남산자락을 굽이돌며 리어카와 한 몸이 되었다. 내 과일을 사려고 기다리는 고객이 있을 정도였다.

마침내 84년, 종로 5가에 작은 치킨 가게를 열었다. 오늘의 ‘치킨 사업’의 밑거름이 됐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보니 시뻘건 불길과 검은 연기가 악마의 혓바닥처럼 널름거리며 가게를 불태우고 있었다.

“여보! 우린 이제 어떡해요.” 아내는 넋을 잃고는 흐느꼈다.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내 한 목숨에 열한 식구의 목줄이 걸려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다면 기적을 보여주세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그렇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가게는 잿더미로 변했다.

당시 우리는 약수동 꼭대기, 그야말로 산동네에 살았다. 그 허름한 곳에 식구가 자그마치 열둘이나 되었다. 시골에서 처남과 처제, 그리고 내 형님의 자녀들까지 불러들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남과 처제들은 장인과 장모가 돌아가신 후 돌볼 사람이 없어 아내와 의논한 끝에 우리가 서울에서 공부시키며 보살피기로 하였다. 결코 여유롭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아내는 열 개가 넘는 도시락을 싸면서도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침이면 아이들의 목소리로 마치 고아원을 방불케 했다. 이 아이들을 생각하니 이대로 마냥 실망하고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새벽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일아, 다시 시작해라,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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