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전정희] 몸의 소비 기사의 사진

하루 일과 중 하나가 ‘몸’을 지우는 일이다. 국민일보 홈페이지 관리자 창을 열어 놓고 댓글 관리를 위해 클릭해 보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음란 등이 판친다. ‘조건만남’을 내용으로 하는 야동성 광고와 인신공격 등이 댓글 코너를 뒤덮었다. 그러한 몸들은 지워도 지워도 끝이 없어 마치 영화 ‘에일리언’의 숙주 괴물 같다.

인터넷은 몸을 욕망하는 자들을 위한 배설창구인 것이 분명하다. 조건만남, 화끈녀, 아찔한 연예인 의상, 몸짱, 성형, 다이어트, 루저녀, 품절남 등 몸을 소비하기 위한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몸은 배설해야 건강하기 마련이라 욕망을 누를 이유는 없다.

‘제 몸을 경건히 하지 않으면 이는 제 부모를 다치게 하는 것’(이이 ‘성학집요’)이라며 몸보다 그 뿌리인 마음(孝)을 중요하게 여긴 조선에서조차 성풍속화나 춘화가 돌았다. 또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풍속이 음란해졌다고 판단, 열녀문을 세일(sale)해 가며 몸단속에 나섰다. 몸의 국가 관리였다.

이렇듯 이 시대 사람들에겐 육신이란 그저 마음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 보니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활쏘기 수업이 고작이었다. 백성은 ‘운동하면 골병 든다’는 속설을 믿었다.

몸의 해방은 근대와 함께 시작됐다. 제 몸의 등급을 규정한 신분의 옷을 벗어 던지고 평등의 양복을 입으면서 욕망 또한 가차 없이 질주하게 되는데 어느 시점 그 욕망이 매스미디어와 결합해 상품화되기에까지 이른다. 이른바 ‘미인 김정필의 본부(本夫)살해 사건’이 한 예다.

1924년 여름. 미모의 여성이 음식에 독약을 넣어 남편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실렸다. 방년 스물의 김정필은 결혼 직후부터 남편이 앓아누워 아내로서의 권리와 행복을 찾을 길이 없어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대중 매체는 연일 ‘본부 독살 미인 사형 불복’ ‘미인 독살 김정필의 옥중 근황’ 등과 같은 제목으로 속보를 전한다. ‘미인’이라는 단어에 끌린 독자는

‘낚시질’에 낚인 네티즌처럼 욕망을 소비했다. 공판이 열린 경성지법 대법정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고 마침내 한 매체가 그녀의 사진을 싣기에 이른다.

‘이쁘긴 무엇이 어여뻐.’

그토록 ‘묘한 계집’을 보고 싶어 했던 ‘근대 독자’는 이 한 마디씩을 남기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그렇다고 욕망을 끊은 것은 아니다. ‘절세 미인 사형’ ‘미인의 철도 자살’ 등의 또 다른 낚시성 제목에 열광했다. 요즘과 달리 댓글 달 데만 없었을 뿐이다.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 시대 근대 독자인 청소년에게 여전히 몸을 소비하도록 어른들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체육 과목이 생겨난 배경을 보면 성적 조숙을 억압하기 위해 500m 트랙을 두세 차례 돌게 한 뒤 취침 전 열탕에 들여보내 녹초로 만들었다고 한다. 축구 등 격렬한 운동이 탄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됐다.

우리 청소년들에게는 성적 조숙을 당기는 욕망은 열어놓고 몸은 시간 감옥 안에 가둬놨다. 아이들은 공부 스트레스로 말미암은 열기를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집으로 와 밤늦게 몸을 서핑한다. 그 나이대가 갖는 욕망과 외로움이 뒤섞인 서핑이다. 그런데도 육신은 풀리지 않는다. 풀리지 않는 화는 손끝으로 나와 루저녀와 같은 공격 대상에 마녀사냥을 가한다. 성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인터넷은 오늘도 몸을 찾는 이들로 붐빈다. 그런데 몸을 찾는 이들 대개는 자신의 몸을 통해 삶을 누리기보다 몸에 의해, 몸을 위해 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몸에 갇혀 산다는 얘기다.

전정희 인터넷뉴스부장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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