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정수익] 새해엔 지고 살자 기사의 사진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육상 5000m 결선 때다. 핀란드의 라우리 라티넨과 미국의 랄프 힐이 치열한 선두다툼을 하면서 거의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사진 판독을 통해 라티넨이 우승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시상식장에서 희한한 광경이 벌어졌다. 두 선수가 서로 상대를 시상대 맨 윗자리로 떠미는 것이었다. 라티넨은 자신의 반칙을 주장했고, 힐은 정당한 경기였다며 상대를 축하해줬다. 두 선수의 승강이를 한동안 지켜보던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 두 선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승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패자를 자처하는 두 선수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감동적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이 승리에 매달리고 있다. 승자가 되기 위한 사생결단의 승부에 몸을 내던지고 있다. 승리를 위해선 사기와 술수, 편법과 반칙도 불사한다.

승리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승리에는 환호와 영광이 따르지만, 패배 뒤에는 굴욕과 좌절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승리를 양보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이쯤에서 잠깐 생각해보자. 한번 이기면 끝까지 이기고, 한번 지면 마지막까지 지는 것일까. 인생사든 세상사든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라면 승리와 패배는 수시로 뒤바뀔 수 있지 않을까. “이기고도 지는 것이 정치고, 지고도 이기는 것이 정치”라고 한 어느 정치인의 말이 비단 정치계에만 적용될까. 져서 오히려 더 큰 이득과 영광을 얻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안다. 하수일수록 눈앞의 싸움에 매달리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어리석음을 범하는 반면, 고수는 그런 싸움에 져주고 대세를 챙기는 사소취대(捨小取大)의 현명함을 발휘한다. 고수는 지고도 이기는 법을 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 속에서 이런 현명함으로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기에 온통 ‘너 죽고 나 살기’식의 살벌한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 자신이 이기지 않으면 부정이고 불의라며 우긴다. 주변의 정치갈등, 지역갈등, 노사갈등, 남북갈등 모두가 꼭 이기겠다는 마음에서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목회자축구팀과 함께 중국 옌볜에서 열린 조선족축구대회에 갔다. 한 축구선교단체가 조선족들의 단합을 꾀하고 그들의 축구 수준을 올려주기 위해 만든 대회였다. 실력이 앞선 목회자팀은 무난히 결승까지 올랐다. 그런데 결승을 앞두고 목회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져주기 작전을 짰다. 결국 목회자팀의 패배 덕분에 우승팀을 중심으로 조선족 사회에선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겉으로는 졌지만 속으로 이긴 멋진 패배의 한 장면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지고도 이기는 길을 택해야 한다. 혼자만 이기는 게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이길 수 있으면 기를 쓰고 져야 한다. 실제로 사소한 부부싸움에서부터 조직이나 국가 간의 이권다툼에 이르기까지 져서 이기는 싸움들이 많다. 져서 아름답고, 져서 위대한 싸움들이다.

이 같은 ‘패배의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 한다. 그분은 끊임없이 지는 길을 택하셨다. 못할 게 없는 능력을 가지신 그분은 마침내 골고다의 패배를 선택하심으로써 부활의 승리를 거두시고 인류의 죄를 구속해주시는 대업을 이룩하셨다. 심지어 그분은 두로의 이방 여인과 설전을 하면서 슬그머니 져주시곤 ‘부스러기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병 고침의 승리를 이끄셨다.

2010년 새해부터는 져주면서 살자. 낮추고 양보하면서 살자. 나를 이기려고 악악거리는 이가 있으면 져주자. 나를 딛고 일어서려고 낑낑거리는 이가 있으면 몸을 숙여 딛게 해주자. 나를 추월하려고 헉헉거리는 이가 있으면 비켜주기도 하자.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대세를 그르치지 않는 한 그렇게 해보자. 그리하여 평화와 행복이 찾아온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자. 그게 바로 지고도 이기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기기는 어려워도 지기는 얼마나 쉬운가.

정수익 종교부장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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