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손영옥] 나만의 산티아고 길 기사의 사진

연말연시 신문 경제면에는 재계 인사가 줄을 잇는다. 경영 세습이 상식이 된 한국사회에서 재벌 2, 3세들의 전진 배치는 늘 화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는 ‘성골(聖骨)’들의 예정된 부상보다 샐러리맨들의 성공 신화가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연말 삼성그룹 인사에서 제일기획 최인아(49) 전무의 ‘여성 첫 부사장’ 승진 소식은 단연 압권이다. 고위직으로의 스카우트이거나 오너 일가의 승진 케이스가 아니라 평사원으로 출발해 일궈낸 성과라서 더욱 값지다. 1984년 입사한 그는 91년 여성 의류 베스띠벨리의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는 카피로 광고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SK그룹의 ‘고객이 OK할 때까지, OK! SK!’, 동서식품 맥심의 ‘사랑의 향기는 영원하다’ 등 숱한 역작을 낸 그야말로 히트작 제조기다.

그는 2007년 연초 인사에서 삼성의 ‘여성 첫 전무’에 올랐다. 내가 경제부에서 삼성그룹을 출입하고 있을 때였다. 덕분에 당시의 최 전무와 차 한 잔 마실 기회가 있었다.



그 무렵, 감동 깊게 읽은 책 한 권이 그를 마주하게 했다. ‘느긋하게 걸어라-산티아고 가는 길’. 조이스 럽이라는 미국의 60대 수녀가 목사 친구와 함께 예수의 제자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는 스페인의 산타아고 순례 길을 걷고 나서 쓴 여행기다. 800㎞나 되는 길을 36일간 걸으며 길어 올린 교훈과 깨달음을 기록했다.

책장을 덮고서야 뒤표지의 추천사가 눈에 띄었다. 수개월 전 삼성 인사에서 전무가 된 최씨가 추천사를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산티아고 순례 길 이야기가 한국사회에 막 퍼져나갈 즈음이었는데, 그는 이미 1년 전 그 곳을 다녀왔던 것. 추천사는 이랬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게는 그곳에 가야 할 동기가 없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떠났고, 걷는 내내 왜 내가 이 길에 서 있는지를 묻는 기이한 순례자였다. 그러다 결국은 그 순간과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내가 왜 순례를 감행했는지 이유가 밝혀지던 순간 말이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에도 멎지 않아 비를 맞으며 걷던 6월의 어느 아침, 속에서 북받쳐 올라온 무엇, 터져 나온 울음 이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이 길에 서 있는지.’

울음 후에 그가 얻었다는 깨달음이 궁금했었다. 차를 나누면서 슬쩍 물었다. 수수한 그는 배시시 웃을 뿐 답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가 어느 신문에 쓴 칼럼을 통해 답을 알게 됐다. 나이 드는 것의 힘겨움이었다. 늙는다는 것이 경쟁력 저하로 치부되는 사회, 그 도도한 통념에 무릎 꿇고 싶지 않다는 중년의 결기였다. 젊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열망이었다.

성공의 대명사 같았던 삶에도 시련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임원이었음에도 무작정 1년의 휴직을 신청하고, 산티아고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불면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짐작컨대, 그 곳에서의 각오가 지금까지 그를 밀어 올리는 힘이 됐을 것이다.

산티아고 길은 깨달음을 주는 곳인가 보다. 많은 이들이 거기를 갔다 왔다. 제주도에 걷기여행코스 ‘올레길’을 만든 언론인 출신 서명숙씨도 그 중 한 명이다. 내가 모르는 더 많은 이들이 그곳을 다녀온 후 자신이 선 자리에서, 혹은 새로운 자리에서 멋진 인생을 일구어 가고 있을 것이다.

연말연시 덕담을 건네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날아온다. 복 많이 받으세요, 소원 성취 하세요, 부자 되세요, 인생 대박…. 나는 ‘나만의 산티아고를 가보라’라고 문자를 보내고 싶다. 그것은 2박3일 겨울 휴가가 될 수 있을 것이고, 한나절 북한산 등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한강변에서 반나절 자전거 타기는 어떤가. 세상과 잠시 격리돼 ‘내가 지금 어디 서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 곳이 나만의 산티아고 길이 될 것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