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래창 (8) 보람찼던 교회 학교 봉사… 교단 활동으로 이어져

[역경의 열매] 박래창 (8) 보람찼던 교회 학교 봉사… 교단 활동으로 이어져 기사의 사진

신촌장로교회에서 아동부 교사를 하던 1967년쯤으로 기억한다. 6학년 반을 처음 맡은 날 아이들에게 돌아가며 성경을 읽도록 했다. 그런데 제 순서에도 우물쭈물 읽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혹시 한글을 못 읽나 유심히 보니 책을 눈에 바짝 대고 읽었다. “너 안경을 써야겠구나” 하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날로부터 한참이 지났는데도 아이는 안경을 쓰고 오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짐작됐지만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공과 수업이 끝난 후 아이 손을 잡고 “너희 집에 같이 가 보자”고 했다.

반쯤은 곤란해 하고 반쯤은 기대를 품은 채 앞서가는 아이를 따라간 곳은 아니나 다를까 판자촌이었다. 손수레로 채소 장사를 한다는 부모는 갑작스런 나의 방문에 당황스러워했다. “아드님이 눈이 안 좋은 것을 아셨습니까?” 하니 전혀 모르는 듯했다. 내 말을 듣고도 ‘어쩌겠느냐’는 반응이었다.

별 소득 없이 집을 나서는데 배웅하는 아이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돌아오는 길에 고민해 보니 교회에 연세대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부목사가 떠올랐다. 그분에게 부탁하니 아이가 세브란스 안과에서 진찰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줬다.

아이의 시력검사를 한 뒤 안경을 맞추던 날, 안경을 쓰고 주위를 둘러본 아이는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니 ‘예수님이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구나. 우리 시대에도 작게나마 이룰 수 있는 기적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늘 주눅 들어 있었다는 아이는 그 뒤로 몰라보게 명랑해졌다.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그 아이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안경을 선물받은 이후로 한 번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잘 살아왔고 지금은 서울 강남 어느 교회에서 성가대 대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또 한번은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려고 접수대에 있는데 한 여의사가 “선생님!” 하고 불렀다. 자세히 보니 20여년 전 제자였다. 어려운 형편에도 동생들 손을 이끌고 예배에 나오던, 의젓하고 기특한 여학생의 모습이 겹쳐져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24년간 직접 아이들을 가르친 뒤 부장을 아동부와 중등부에서 2번씩, 고등부에서 4번을 지내고 나니 16년이 훌쩍 갔다. 그 40년 동안 이미 얘기한 북방선교부장을 비롯해 건축부장, 성가대 대장, 서기 등도 교회에서 맡아 했고 그와 관련된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일에도 참여해 왔다. 4∼5년 전부터는 총회 회계, 장로회연합회장, 사회봉사부 부장, 한국장로교복지재단 대표이사, 한국장로신문사 사장 등 중책을 맡겨 주셔서 일하고 있다. 알고 보면 여기에도 교사 경력이 관련이 있다. 초임 교사 시절 교단 아동부 서울지역 회장과 전국연합회 서기를 맡은 뒤로 자연스레 교단과 범 교계로 활동 범위가 넓어졌던 것이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나는 사업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바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교회 안팎의 사역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도록 고비마다 사업을 책임져 주셨다.

그야말로 입에 풀칠할 길 없어 막막하던 20대 중반에 드린 “아무 일이나 좋으니 주십시오”라는 기도에 교회학교 일부터 덜컥 맡기셨던 하나님께서는 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방향에서 나에게 딱 맞는 생업을 준비하고 계셨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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