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인간에게 던진 두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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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9절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동산 수풀 속에 숨어버린 아담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숨바꼭질 하듯이 찾는 음성이 아닙니다. 죄를 범하고 있는 아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아담, 방향 감각을 상실한 아담을 부르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은 오늘날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실 때 과거를 생각하시며 “네가 어디 있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미래를 생각하시며 “네가 어디 있을 것이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있는 아담의 모습을 보고 묻고 계십니다.

가인에게 물으실 때도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고 물으셨고,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생명을 거둬 달라는 엘리야에게 물으실 때도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 13)라며 현재 진행형으로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질문을 끝없이 하십니다. 하나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이고 다른 하나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아담을 찾으시는 질문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로 인한 질문이라면, 가인에게 아벨을 찾으시는 질문은 이웃을 향한 윤리적인 책임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즉, 아담을 찾으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되어져야 할 존재가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고, 가인에게 아벨을 찾으시는 것은 이웃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할 책임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이는 필연적 사명으로서 서로 보완적인 관계입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적당한 사잇길이나 요행의 출구를 마련해 놓고 그리로 들락날락하면서 마치 정문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로몬 재판에서 자기 아들이 아니니 아이를 갈라서 반은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하는 악한 여인을 연상하게 하는 파렴치한 모습들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어 너무나 마음 아픕니다.

십자가만 걸쳐놓으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빛과 소금)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세상은 그만큼 더 밝아져야 되고 부패와 타락은 점점 더 사라져야 되는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마치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삼손처럼 덩치는 크나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꼴이 되지 않았는가요?

그리스도 없는 세상을 구한다거나 세상없이 그리스도만 구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하면 자기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세상에 대해 책임자의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던 모세가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들었던 음성, 드고아 목장에서 양을 치던 목자 아모스에게 들렸던 음성, 이화학당 학생시절 “너는 저 불쌍한 여인들을 구해야 한다”며 김활란 박사가 들었던 음성, 이런 것들을 우린 들어야 합니다. 이런 음성은 모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오늘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십니다. 목회자와 성도,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여, 지금 하나님의 어떤 부름을 듣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엄상현 목사 평택 좌동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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