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서완석] ‘조선왕조 의궤’와 국격 기사의 사진

‘기록의 나라’ 조선국은 왕실의 혼례, 장례 같은 행사와 주요 토목 공사가 끝나면 추진 상황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겼다. 후세 사람들이 참고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의궤라는 이름의 이 기록물은 조선왕조 600년간 3897책의 방대한 분량을 남겼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의궤는 오늘날 영상시대를 예견이라도 한 듯 현장 모습을 상세한 그림으로 묘사해 생동감을 더한다.

600년 품격있는 문화국가

1866년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군이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을 피해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서 191책 296권의 의궤를 약탈해 갔다. 그들이 외규장각 도서 중 유독 의궤를 집중적으로 탈취한 것은 품격 있는 장정과 사적 가치, 채색 그림이 지닌 예술성에 눈을 뜬 때문이었다. 당시 강화도에 주둔한 프랑스 해군 장교 주베르가 “한 가지 자존심 상하는 일은 아무리 가난해도 집에 책이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고백했듯 조선인들은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릴 만큼 책을 가까이했다.

의궤처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우리 문화유산은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동의보감을 포함해 모두 7건이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다 보유국이다. 비록 서구 열강의 무력에 맞서 나라 지킬 힘은 없었지만 문화 콘텐츠만큼은 결코 그들에게 뒤진 나라가 아니었다. 품격 있는 문화국가였던 것이다.

올 들어 ‘국격’이란 말이 사회적 어젠다로 급격히 떠오르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국격을 키우는 원년으로 만들자고 한다. 오는 11월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되면 국격이 높아질 것이란 기대도 크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경제 강국 회의체를 주도한다는 것 자체가 국격을 만천하로부터 인정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를 통해 우리는 엄청난 감동과 더불어 국민의식 수준이 한 단계 높아졌음을 실감했다. 세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세계를 체감하며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해 온 국민이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대한 문화유산을 지닌 우리가 새삼스레 국격을 운위하는 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국격에 맞지 않는 무지와 억지가 곳곳에 움트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국격이 국가 구성원의 의식 수준과 삶의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국제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 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격 높이자

무엇보다 국제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낮다는 게 자주 지적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조차 “한국의 공적개발원조(ODA)는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꼬집을 정도다. GNI(국민총소득) 대비 공적개발원조는 0.09%(2008년)에 불과하다. 이는 OECD 평균(0.3%)의 3분의 1 수준이고 유엔 권고 기준(0.7%)에 턱없이 모자란다. 1인당 소득이 비슷한 포르투갈(0.27%)에 비해 낮고 우리와 경제 규모가 비슷한 호주(0.34%) 네덜란드(0.80%)에도 크게 뒤진다. 때마침 최근 지진으로 국가 기능이 마비된 아이티에 전례 없이 신속한 정부 지원책이 가동된 것은 다행스럽다. 이 같은 공적지원 외에 기독교단을 중심으로 한 민간 차원의 지원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것은 우리의 국격을 한 단계 고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이 살기 힘든 우리네 환경도 국격 저하 요인이다. 최근 서울YMCA가 조사한 외국 유학생 생활 실태를 보면 아직도 한국은 외국인이 살기 어려운 곳이다. IT 강국이라지만 외국인이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는데 곤란을 겪으며, 영화 표 예매도 어렵다고 한다. 외국인 등록번호를 입력하면 ‘잘못된 주민등록번호’라는 답만 나온다고 한다. 주택 월세에 바가지 요금이 여전하고, 은행 병원에서는 말이 안 통해 서비스에 제한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타협을 모르는 노사,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정치판도 국격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자주 지적되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극렬 투쟁이 지방의회로까지 전염되는 상황이다.

가을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는 일반 국민보다 정치인들의 품격을 높이는 장이 됐으면 한다. 선진국 지도자들이 타인과의 의견 차이를 어떻게 좁혀가는지, 타인을 존중하는 품격 있는 언어로도 상대를 어떻게 설득하는지 배웠으면 한다. 이참에 정부는 조선왕실의궤처럼 멋진 G20 정상회의 기록화 몇 점 남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서완석 부국장기자 wssu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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