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이영미] 이란 민주화가 걱정이면 기사의 사진

타이밍이 절묘했다. 한 세기 넘게 창고에서 뒹굴던 토기 조각은 왜 지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 배경은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개 먹이용 비스켓 크기’라는 토기 편(片)이 대영박물관을 곤경에서 구했다는 사실이다. 지난달 5일 고대 비문의 깨진 조각 두 개가 대영박물관 창고에서 발견됐다. 박물관이 비문을 소장한 1881년부터 계산해 129년 만이다.

토기 편은 고대 페르시아 ‘키루스(고레스) 원통 비문’의 유실된 조각이었다. 1879년 발굴된 키루스 원통 비문은 BC 539년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왕조) 키루스 대왕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뒤 새긴 일종의 포고문이다. 키루스는 정복 후 노예를 풀어주고 각종 신전을 재건했다. 그리고 이를 비문에 새겼다. 고대 세계에서 학살과 약탈은 전과(戰果)였다. 승전국 제왕에겐 패전국 백성을 배려할 이유도,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2500년 전 비문에 담긴 관용과 포용의 언어는 고대적 맥락에서 혁명적이다. 이 비문을 ‘세계 최초의 권리장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반가운 일인데 어쩐지 시점이 마법 같다. 지난해 1월 대영박물관은 키루스 비문을 이란국립박물관에 3개월간 빌려주기로 했다. 상호대여 방식이었다. 당시 대영박물관은 16∼17세기 사파비 왕조(이란의 이슬람 왕조)를 주제로 한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시는 이란 측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거대 프로젝트인데 양국 관계는 악화일로였다. 이란이 최초로 위성을 발사하고, 영국문화원이 항의 표시로 이란 수도 테헤란 사무소를 폐쇄한 게 그 무렵이다.

교착상태를 깬 건 키루스 비문이었다. 이란은 키루스 비문을 대여해 달라고 역제의했다. 대영박물관이 이를 수락하면서 교류는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협정 서명 3주 후. 런던에는 이란 8개 박물관에서 출발한 12개 컨테이너 분량의 페르시아 카펫, 모스크 장식물 등이 도착했다. 이란의 ‘잠재적 적국’ 영국에서 이뤄진 대규모 ‘샤 압바스’ 전은 그렇게 성사됐다.

올 게 왔으니 이번엔 갈 차례였다. 약속대로라면 대영박물관은 지난해 9월 키루스 비문을 선적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해 여름 이후 영국 측 기류는 미묘하게 변했다. 지난해 6월 대통령 선거 부정 시비로 불붙은 이란 민주화 시위가 유혈 진압된 뒤 영국 정가에서는 대영박물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독재국가 이란에 귀중한 유물을 빌려줘야 하느냐는 불만이었다. 박물관은 미적댔다.

비문 조각은 바로 이 시점에 발견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표현처럼, 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What a stroke of luck)? 새로운 발견이 이뤄졌으니 일단 조사하고 살펴볼 시간이 필요했다. 대영박물관은 “학술적으로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이란에 6개월 대여 연기를 요구했다. 오는 6월 국제 학술대회에 이란 학자들도 대거 초청했다.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부통령이 나서서 계약서에 서명하고 국보를 빌려줬던 이란 정부는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됐다. 19세기 말 바빌론(현재의 이라크)에서 발굴, 반출된 키루스 비문은 애초 영국의 유산이 아니다. “키루스 비문은 특정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유산”이라는 영국 측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쌍방이 맺은 계약을 파기한 것까지 용인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떠들썩한 영국 언론 어디에도 이 명백한 계약 위반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없다. 균형적 시각을 자랑하는 파이낸셜타임스도 “자유를 주장한 고대 비문이 테헤란의 독재자를 불안하게 할 것”이라며 비아냥댔다. 비문의 이란 대여에 대한 간접적 반대다.

이란 민주주의가 문제라면 그건 그것대로 따질 일이다. 제국주의 시대 타국 땅에서 파온 유물을 제나라 무기인 양 손에 쥐고 흔들며 민주주의를 들먹이는 건 주장의 진의를 오해하게 만든다. 자칫 이란 민주화 운동마저 위협하는 행동이다. 이란 국민들이 민주화 요구를 오만한 서구 국가의 내정간섭으로 여기는 순간, 유럽이 그렇게 걱정하는 이란 민주화 세력의 입지는 더 좁아질 것이다.

이영미 특집기획부 차장 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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