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낙인’ 식민지 지식인의 자화상… ‘윤치호의 협력일기’ 기사의 사진

윤치호의 협력일기/박지향/이숲

좌옹 윤치호(1865∼1945)는 친일파다. 그는 신사참배를 했고, 한국 청년들은 징병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매일신보에 기고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 귀족원 칙선위원으로 임명됐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우리는 윤치호를 친일파라고 규정한다.

친일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이상 그의 모든 행동은 부정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의 행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박지향(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친일파라는 표현이 행사하는 대단한 영향력이 비춰 볼 때 진지한 학문적 연구는 창피할 정도로 일천하다”고 지적한다. 감정에 치우쳐 비난을 할 것이 아니라 정확히 어떤 행동을 왜 했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제대로 비판하자는 뜻이다.

박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가 친일파를 대하는 태도가 현재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선대 사람을 꾸짖는 ‘후손들의 오만함’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고 환기한다. 미리 친일파라고 선고한 뒤 그의 행적을 짜맞출 것이 아니라 잠시 판단을 유보하고 그의 삶을 관찰하고 공과를 가리자는 것이다.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그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양심과 지조를 버리고 민족을 배신한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오늘날 친일파에 대한 보편적 정의이기도 하다. 윤치호는 당시에 소위 친일파라고 불리는 인물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1920년 임시교육 조사위원회에 임명하겠다는 총독부의 제안을 거절한 것도 윤치호였다. 이완용과 같은 위원회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배반자들이 보상받을 때마다 그 배반자들의 근본과 조선인종의 슬픈 상황을 상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1897년부터 독립협회에 적극 가담해 독립협회 2대 회장을 지내고 서재필이 미국에 돌아간 후로는 독립신문을 맡아 발간했다. 데라우치 마사타게 총독 암살음모로 알려진 105인 사건에 연루돼 1912년부터 3년 가까이 수형생활도 했다. 그런 윤치호가 1938년 이후 명백한 친일활동을 한 것은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책은 윤치호가 60년간 쓴 11권의 일기를 통해 그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는 3·1운동에 반대했다. 독립이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선동에 따라 독립을 외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애국심이 발동한 젊은이를 사지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선동자들에게 분노를 느낀다고 할 정도였다. 국제정세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그의 안목은 오히려 민족 저항운동이 비현실적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하는 족쇄가 됐다. 심지어 그는 일본이 독립을 허락해도 조선 사람은 그것을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봤다. 그래서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할 시간에 차라리 국내에서 교육과 계몽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는 역량을 갖추는 노력이 있어야 독립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저자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민지배하에서 지식인을 포함한 모두가 택할 수 있는 삶은 두 극단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저항하는 것이었다. 대다수 군중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적극적인 친일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협력의 정도나 동기 등은 면밀하게 분석될 필요가 있다. 물론 저항을 통해 협력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음을 환기한 이들의 숭고한 노력이 더욱 인정받아야 함은 물론이다.

저자는 머릿말에서 “정치권이 개입할 때 친일 문제는 여지없이 그들의 정략적 야욕에 놀아나는 장난감이 된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을 위해서는 감정적이고 정략적인 논쟁보다 오랜 기간에 걸친 학문적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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