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한민족 DNA가 켜켜이… 시대별로 보는 한복의 변천사 기사의 사진

여자들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날, 좌식 식당을 피하려고 한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복을 입었을 때는 좌식 환경이 편하다. 깨끗한 방바닥에 치마 끝이 닿아도 걱정이 없고, 무릎을 포개거나 세우고 앉기에 편하다. 이처럼 의복의 발생은 주거환경과 생활 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옷의 특징을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그 옷을 착용한 민족의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 민족의 의복 ‘한복’의 변천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전통문화의 한 단면을 연구하는 것이고 민족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 조선시대, 개화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복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당대의 사회적 배경이 반영되는 옷의 특성 상, 한복의 변천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전통문화의 맥을 지켜온 우리옷의 의미를 재인식하게 된다.

한복은 기본 형태를 유지한 채 시대에 따라 변형되고 외부 요소가 가미됐다. 한복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지만 김은정 전남대 의류학과 교수는 저서 ‘역사속의 우리옷 변천사’에서 “삼국시대의 복식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원형이 정착되고 형성되었다기 보다 고조선 이전 부족국가 성립기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발전돼 왔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국시대 이전 사료에서 복식에 관한 부분은 미비하기 때문에 한복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삼국시대를 기점으로 한복의 변천사를 따라가려 한다. 삼국시대의 의복에 대해서는 실물복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복식문화의 성숙기인 통일신라시대는 중국풍 복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복식금제령 등 복식사적인 사건을 겪었다. 고려시대는 한국복식문화의 정체기다. 당·송·몽고족의 영향을 받아 한복도 변화한다. 조선시대는 한국복식문화를 꽃 피웠다. 궁중 복식이 정립됐고 다양한 종류와 화려함을 자랑했다. 이어 격동의 시대 개화기에는 서양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한복의 서양화가 이뤄졌다.

삼국시대(BC37∼676년)… 저고리·바지에 관모·대 기본틀 갖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세 나라의 문화가 어우러진 삼국시대는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한 중요한 시기다.

삼국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외부문물의 유입경로가 비슷하기 때문에 복식 문화가 전반적으로 유사성을 보인다. 삼국시대 복식의 기본형은 저고리와 바지를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관모, 대(帶), 신발 화(靴)가 첨가된 형태다. 북방 호복계통의 의복으로 유목민이 말을 타거나 이동 중에 불편함이 없도록 소매폭이 좁은 저고리와 폭이 좁은 바지를 기본으로 한다.

저고리를 뜻하는 ‘유’는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형태다. 깃은 ‘직령’으로 곧게 뻗어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쌍영총, 수산리 고분벽화에서 직령을 볼 수 있다. ‘유’의 소매는 몸에 꼭 맞았는데 이는 활동량이 많고 보온성이 중요한 기마민족의 생활을 반영한다. ‘유’ 위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계층이 ‘포’를 입었다.

바지인 ‘고(袴)’는 계층에 따라서 모양이 달랐다. 상류층은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고, 하위 계층은 폭이 좁아 활동적인 바지를 입었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치마인 ‘상(裳)’을 입었다. ‘상’은 허리에서 착용해 땅에 닿을 만큼 길었다. 잔주름이나 장식선 색동치마를 가미해 다양한 양식을 만들었다.

통일신라시대(676∼935년)… 귀족들이 꽃피운 우리 옷 전성시대

삼국을 통합한 통일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발달된 문화를 흡수하고 당과의 관계를 개선해 활발한 교류를 펼쳐 문화적으로 융성했다. 더불어 복식문화도 발전해 전성기를 이뤘다.

이 시대 의복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청사관복(請賜冠服)’이 계기였다.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기 위해 김춘추가 당에 갔을 때 관복제도를 중국의 것으로 받아들인 사건이다.

여자 복식이 직접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계기가 됐고, 이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국으로부터 관복을 들여오는 과정에 머물렀다.

삼국시대에서 겉옷인 ‘포’의 자리를 이 시대에는 ‘표의(表衣)’가 대신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깃이 둥글고 소매가 넓은 ‘단령(團領)’이 관령으로 도입돼 궁에서 입었다. 또한 표의 아래 착용한 내의는 고급 소재를 이용해 계층을 드러냈다.

이 외에도 골품계급에만 허용된 ‘반비(半臂)’ 허리를 묶는 ‘요대(腰帶)’로 멋을 냈다. 귀족 중심으로 의상이 발달하다보니 치장이 심해졌다.

배자와 같은 ‘배당’은 4·5·6두품 여자들만 입어 지위를 과시했다.

여인들의 목 뒤에서 가슴 앞으로 드리운 ‘표’도 평민계층의 여인에게는 금지됐다. 섬세한 세공기술과 화려한 문양을 자랑하는 금속관모가 발달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고려시대(918∼1392년)… 남녀·계급 간 의상 차이 줄어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체제를 정비한 고려시대는 고구려의 전통성을 계승했으나 신라의 문물 위에 건국되어 복식에서 통일신라제도 및 중국제도가 많이 나타난다. 중국이 송, 원, 명으로 바뀔 때마다 덩달아 우리의 한복도 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지배계급은 중국양식의 의복을 입고 서민계층은 고유복식을 입은 이중적인 구조는 계속됐다.

하지만 이 시대는 통일신라 시대에 비해 전체적으로 의복에 꾸밈이 적다. 여성 차별이 덜하고 계급 간 격차를 크게 강조하지 않은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포’의 깃은 이중깃이고 옆이 트여있는 반수포가 대세였다. 허리에 주름이 잡힌 ‘요선철릭’은 고려시대에 처음 나타났다. 허리에 잡힌 선을 중심으로 저고리와 치마를 연결하는 이 옷은 원의 복식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여자들도 남자와 같은 형태의 ‘포’를 입었다. 상당히 긴 길이의 포에 허리띠를 매어 치장을 했다.

치마는 계층과 상관없이 황색의 ‘상’을 입었다. 하지만 왕비와 왕족은 ‘홍상’을 입어 계급을 드러냈다.

조선시대(1392∼1876년)… 몸에 붙는 저고리, 야해진 여성복

조선은 건국 초기 고려말 명에서 들여온 복제를 그대로 계승하는 듯 했다. 하지만 여성 의복에서는 비교적 옛 풍속이 그대로 유지돼 명의 복제가 잘 수용되지 않았다. 또한 상품화폐 경제가 발전하면서 신분의 이동이 활발해지자, 상류계층의 전용인 ‘표의’ 등 계층을 드러내는 의복을 착용하는 평민이 늘어났다.

‘포의’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직분과 신분, 상황에 따라 착용하도록 분류가 세분화됐다. 소매가 좁은 ‘직령’은 가장 많이 애용된 ‘포의’다. 후기로 가면서 소매가 넓어지고 옷깃은 완만하게 변했다. 또한 뒷면에 트임이 있어 말을 타거나 앉을 때 편한 ‘도포’는 남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저고리는 후기로 갈수록 짧아져 가슴이 보일 정도였다. 팔 폭도 좁아져 마치 팔에 대고 옷을 꿰맨 듯했다. 소매는 갈수록 곡선으로 변했고 목판깃은 좁아지면서 둥글어졌다. 상의가 몸매를 드러냈다면 하의는 길이가 길어져 풍성하게 변했다. 서민복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저고리와 바지·치마가 기본을 이룬 고유 복식의 명맥이 이어졌다.

여성에게 가혹하게 적용돼온 유교적 도덕관이 약화되면서 여성 의복은 성적표현과 장식성이 강조됐다. 가체가 크고 무거워졌으며, 상의는 몸에 밀착되고 하의는 부풀리는 형태가 유행했다.

개화기 이후(1876∼1945년)… 마고자·조끼 등장, 실용성 강조돼

조선후기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근대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개화의 물결은 의복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의복은 계급을 나타내는 기능이 줄어든 대신 실용을 중시하는 형태로 대중화된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이 단행한 갑신의제 개혁으로 관복은 흑단령으로 통합되고 도포나 창의, 광수포는 두루마기로 간소화돼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입었다.

을미개혁에서는 공사예복에 두루마기인 ‘주의’만 입도록 관복은 간소화되고 머리는 단발령 시행으로 단순화됐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제복, 군복, 학생복을 모두 서양식으로 바꾸어서 전통복식이 본격적으로 양복과 혼용되기 시작한다.

이 시대에 만주족의 방한용 옷이었던 마고자가 도입된다.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마괘라고 하고 저고리보다 품도 넓고 길이나 소매도 넉넉하다. 서양의 영향으로 우리 고유의 복식에는 없는 조끼가 실용성에 의해 등장한다. 서양의 조끼와 형태는 비슷하나 옷감은 한복지로 한다.

여성 의복은 천주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는다. 저고리는 서양의 블라우스처럼 길이가 길어지고 치마는 점점 짧아진다. 여성의 마고자는 남자의 것과 비슷하나 치장을 더해 한층 사치스러워졌다. 여성은 바깥출입이 자유로워지고 쓰개치마나 장옷이 사라지면서 ‘주의’ 착용이 보편화됐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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