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성기철] 고건 위원장에 대한 기대 기사의 사진

전남지사, 청와대 정무수석,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내무부 장관, 국회의원, 서울시장 두 번, 국무총리 두 번, 대통령 권한대행.

유사 이래 이토록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관직뿐 아니라 명지대 총장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까지 지냈으니 각계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하겠다. 올해 72세인 고건씨가 바로 그다. 박정희 시대부터 7개 정부에서 정무직을 맡은 진기록을 갖고 있다. 이명박 정부라고 그를 가만히 놔두겠는가. 이 대통령은 수개월간의 삼고초려 끝에 지난해 12월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장에 임명했다.

능력·권위·소탈함 갖춘 총리

개인적으로 고 위원장을 처음 만난 것은 총리직을 수행하던 1997년. 기자로서 총리실을 출입할 때다. 고위 공직을 오래 지낸 탓에 목에 힘이 들어가고 딱딱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끔 출입기자들에게 저녁을 살 때면 자리를 옮겨 다니며 참석 기자 전원에게 소주잔을 돌리곤 했다. 총리로서의 권위를 지키면서도 남다른 소탈함을 보여줬다. 그 전에 여러 총리를 가까이서 지켜본 나로서는 참 멋있는 양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 그에게 다소 실망한 적도 있다. 김대중 정부 첫해인 98년 6월. 대통령이 공동여당(국민회의, 자민련)의 지방선거 지휘부와 공동여당 출신 수도권 광역단체장 당선자 3명(고건 서울시장, 임창열 경기지사, 최기선 인천시장)을 청와대로 초청해 축하연을 베풀 때였다. 직전 김영삼 정부가 끝날 때까지 총리를 지낸 사람으로서 김대중 새 대통령을 칭송하는 인사말이 좀 과했다는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기자들이 지켜보는 공개석상임에도 ‘용비어천가’를 거리낌 없이 불렀다. 그렇게까진 안 해도 됐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능력이 워낙 출중한 것 같아 아직도 호감을 갖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총리직을 수행하면서도 최적임자란 평가를 받았다. 정권 초기 대통령이 갖가지 튀는 언행으로 국민이 불안해할 때 공직사회를 다잡아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때로는 대통령에게 맞서는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다.

이런 그에게 국민들도 높은 점수를 준 것 같다. 대선을 1년 앞둔 2006년, 대선 예비 후보 여론조사에서 상당 기간 1위를 유지했다. 지지율이 한때 30%를 웃돌아 2007년 1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기 전까지는 이명박 대통령의 가장 유력한 야권 대항마였다.

세종시 해법부터 제시해야

이 대통령은 고 위원장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여권 내 주요 인사들이 사회통합위원장에 고씨를 앞 다투어 천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통합적 이미지, 중도실용 철학, 높은 도덕성, 풍부한 행정경험 등이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해 12월 간판을 내건 사회통합위원회는 지난달 1차 회의를 갖고 10대 핵심 과제를 제시하는 등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고 위원장은 사회적 갈등 해소에 최선을 다하되 정치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른바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셈이다. 민감한 정치 문제에 손대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일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사회 갈등을 해소하자면서 정치적 갈등을 외면해서야 될 법한 일인가. 모든 사회 갈등의 뿌리가 정치에 있음을 국민들은 다 안다. 보수·진보 간 이념적 갈등, 영호남과 충청까지 뒤얽힌 지역적 갈등의 바탕은 정치이며 이를 해소하지 않고는 결코 사회통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고 위원장도 잘 알 것이다.

고 위원장은 사회통합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북한 산림녹화를 내걸었다. 보수와 진보가 함께할 수 있는 사업이란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사업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실망이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 현재 우리 사회 갈등의 핵심은 세종시 문제다.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않고는 국정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사회가 갈기갈기 찢기는 형국이다.

이 시점에서 세종시 문제를 외면하면 사회통합위원장으로서 무책임하게 비친다. 정치권이 풀기 어려운 난제에 대해 객관적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든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국민들은 그것을 원하고 있다. 사회통합운동이 고담준론, 탁상공론에 그쳐서는 의미가 없다.

성기철 편집국 부국장 kcsung@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