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가 뭐였지?”… 늘어나는 ‘디지털 치매’ 기사의 사진

녹슬어가는 기억… ‘뉴로빅스’로 예방

“늘 단축키를 사용하다보니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 집 전화번호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간단한 암산도 휴대전화 내장 계산기로 검산을 안 하면 안심할 수 없는 내 자신이 황당하다.”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를 자처하는 회사원 이모(52·남) 씨의 하소연이다. PDA(개인 휴대 단말기)와 휴대전화, 노트북, 내비게이션 등 최신형 디지털기기에 익숙한 그는 “요즘 들어 사소하고 기본적인 것들을 종종 잊어 고민이다.

이씨는 몇 번이나 같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비밀번호와 ID를 기억하지 못해 불편을 겪기도 했다. 몇 해 전부터 대형 포털사이트들이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로 1∼3개월마다 한 번씩 비밀번호를 바꾸도록 하면서 기억력의 한계가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디지털 만능 시대가 현대인의 기억력과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역기능을 낳고 있다. 온갖 정보를 대신 기억해 주는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매일 사용하는 전화번호나 비밀번호 같은 것들을 종종 떠올리지 못하는 ‘디지털 치매’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가 지난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런 증상을 경험한 직장인이 10명 중 6명 이상(63.5%)에 이르렀을 정도다. 이들은 당시 ‘외우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을 때’(65.7%), ‘휴대전화 등 디지털 기기가 없으면 불안할 때’(57.8%), ‘단순한 암산도 계산기로 할 때’(46.8%), ‘손 글씨보다 키보드가 더 편할 때’(45.9%), ‘가사를 끝까지 아는 노래가 별로 없을 때’(35.2%) 디지털 치매라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디지털 치매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디지털 기기의 편리성 때문에 기억을 하거나 계산을 하는 데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집중력 부족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에서 디지털 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됨에 따라 해당 사항에 대한 학습능력이 감퇴하는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가사 없이 끝까지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별로 없다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는 집과 가족뿐이다 △암산한 것을 계산기로 꼭 확인해야 한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는 것보다 내비게이션을 더 신뢰한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키보드 입력이 더 편하다 등을 경험했다면 디지털 치매를 의심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디지털 치매가 노인성 치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디지털 기기 의존도가 높다는 것 자체가 곧바로 뇌 기능의 이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이화영 교수는 “다시 말해 뇌 손상에 의해 단기 기억 세포가 아예 죽어버린 노인성(알츠하이머형) 및 혈관성 치매와 달리 디지털 치매는 기억 인출 기능이 활동을 안 하고 잠자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디지털 치매 해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가급적 디지털 기기를 멀리 하고 직접 머리를 굴려 잠자는 두뇌를 일깨우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를 많이 사용할수록 검색의 편리성은 커지지만 기억의 중요성은 낮아지기 때문에 흔히 체력 단련을 위해 에어로빅을 하듯 두뇌를 훈련하는 ‘뉴로빅스’(Neurobics)를 실천하라는 얘기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는 쓰면 쓸수록 뇌세포가 증가한다.

이를 위해선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람들의 전화번호나 좋아하는 노래 몇 곡 정도는 외우는 게 좋다. 또 신문이나 잡지를 매일 한 두 시간 꼼꼼히 읽는 것도 유익하다. 생각하면서 읽는 기사는 기억력과 사고력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 항상 필기구를 들고 다니며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울러 일기 쓰기도 권장된다. 뇌의 기억 인출 기능을 활용해 그 날 겪은 일들을 다시 꺼낸 다음 자신의 감정을 싣는 작업이라 기억력을 유지하는 데 이롭다. 중앙대병원 정신과 박두병 교수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자투리 시간에 시집 등 가벼운 독서를 생활화하고 그날 일을 컴퓨터가 아닌 일기장에 기록하며 하루를 마감하는 것은 디지털 치매 예방은 물론 정신건강 상으로도 아주 좋은 습관”이라고 강조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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