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이명희] 거물  모시기 기사의 사진

‘엔로니티스(Enronitis)’. 2001년 미국의 거대 에너지 회사인 엔론이 파산한 후 등장한 신조어다. ‘Enron as it is(엔론과 같은)’를 축약한 것으로 엔론처럼 재무구조가 부실하거나 변칙회계 의혹에 휩싸여 있는 기업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엔론은 5년 연속 포천지에 의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10대 기업에 선정되고, 2000년 경영진 자질 부문에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12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숨기고 63억 달러밖에 안 되는 매출을 1000억 달러로 분식회계를 했다가 파산했다. 당시 부정을 감시해야 할 14명의 이사진 중 11명이 사외이사였다. 하지만 이들은 연간 35만 달러씩 보수를 받고 엔론으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단체에 속해 있거나 엔론의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회계 조작에는 눈을 감았다. 영국 상원의원으로 에너지부 장관을 지낸 존 웨이크햄, 엔론으로부터 33만 달러의 기부금을 받은 텍사스대학 MD 앤더슨병원의 존 멘델손 원장 등이 엔론에서 사외이사로 활동했다.

이들은 몇 년 후 엔론의 주식 투자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개인재산 1300만 달러를 포함해 1억6800만 달러를 토해내야 했다. 미국은 2001년 엔론 스캔들 이후 ‘사베인스-옥슬리법’을 통해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크게 강화했다.

주총 시즌에 접어들면서 국내 대기업들 사이에 ‘거물급 사외이사 모시기’가 한창이다. 전직 검찰총장은 영입 0순위다 보니 두 곳 이상의 사외이사를 맡는 게 예사다. ‘경제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장, 기획재정부와 옛 산업자원부 장·차관도 옷을 벗기 무섭게 기업들의 ‘러브콜’ 세례를 받는다.

전직 관료들의 기업행은 사외이사 자리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지난해 말 W기업은 전 서울국세청장을 부회장으로 영입해 관련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얼마 전엔 S기업이 기획예산처와 경제기획원 등을 거친 전 국무조정실 차장을 미래전략위원회 위원장에 앉혔다. 두 기업 모두 공격적으로 사세를 불려가는 중이다.

기업들은 경륜과 전문성을 갖춘 사외이사를 영입해 경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행태를 바라보는 외부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막강한 인맥과 영향력을 갖춘 거물급들을 끌어들여 검찰 수사나 세무조사 등을 비켜가고 ‘외풍’을 차단하려는 ‘일종의 방패막이 성격’이 짙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지난해 말 새 회장을 선출한 KB금융지주에서 사외이사의 전횡이 논란이 된 적이 있지만 국내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오너 결정을 뒤집었다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2003년 6월 사외이사가 사내이사보다 더 많았던 SK텔레콤이 오너가의 결정에 반발, 부실 계열사 지원을 거부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SK텔레콤 사외이사들은 그 이듬해 경영 능력이 검증된 표문수 사장이 최태원 SK㈜ 회장, 손길승 당시 SK텔레콤 회장과 함께 동반 퇴진하는 데 대해 반기를 들기도 했다.

2008년 하반기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국내 대다수 기업들이 ‘오너 경영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선 전문경영인보다 오너의 신속한 결단이 요구된다는 이유에서다. 경영권 세습 논란에 휩싸였던 삼성 현대자동차 등 주요 기업들이 3세 오너로의 경영권 이양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면서 오너 전횡을 견제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해야 할 사외이사 수를 오히려 줄이거나 ‘거수기’ 또는 ‘로비스트’로 영입하고 있다.

14년간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으로 우뚝 섰던 도요타가 글로벌 금융위기 후 창업주의 장손을 최고경영자(CEO)에 앉히면서 리콜 사태를 겪은 것은 단지 ‘오비이락(烏飛梨落)’일까. 도요타에는 사외이사가 한 명도 없다.

이명희 산업부 차장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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