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이영미] 막걸리 잔 공모전 기사의 사진

지난 1일 농림수산식품부가 막걸리 잔을 표준화하겠다고 나섰다. 막걸리 잔 공모전을 열어 당선작을 대중적으로 보급하겠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나서서 교량이나 공원, 가로등 같은 공공시설의 디자인을 공모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식탁에 오르는 그릇 디자인을 뽑는다는 얘기는 난생 처음이다. 점심시간마다 담임교사에게 잡곡밥을 검사받던 시절에도 보리밥이나 콩밥에 적합한 도시락 용기를 공모했다거나, 잡곡밥이 잘되는 밥솥을 공모했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쩌다 정부는 막걸리 잔까지 공모하게 된 걸까, 혹은 왜 정부는 막걸리 잔을 표준화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갖게 된 걸까.

공모전 취지를 설명한 홍보 문구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건강한 음주문화를 위한 정량의 잔과 ….’ 담당 부서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런 얘기다. 막걸리 잔은 업소마다 크기가 달라서 ‘막걸리 한 잔’이라고 말할 때 정확한 양을 가늠하기 어렵다. 잔 크기를 표준화하면 “주량은?”이라는 질문에 “소주 ○잔, 맥주 ○잔” 하듯 “막걸리 ○잔”이라는 계량화가 가능해진다. 계량화가 되면 음주량을 조절할 수 있고 따라서 건강한 음주문화가 정착될 거란 논리다. 과연 그럴까? 두고 볼 일이다.

공고문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우리 대표 전통주로서 빠르게 자리매김하는 막걸리의 위상을 견고히 하기 위해….’ 막걸리 잔 공모의 또 다른 취지가 ‘막걸리의 위상 제고’란 얘기다.

막걸리는 그간 찌그러진 양은 주발(周鉢)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최근 2∼3년 일본에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유행이 역수입되면서 전통주 막걸리는 재기의 기회를 잡게 됐다. 마침 한식 세계화가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시점이다. 막걸리를 한국 전통 술로 세계에 마케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난해 한식세계화추진단이 꼽은 한식 대표상품 중에는 김치, 떡볶이, 비빔밥과 함께 전통주가 있었다.

기회는 잡았는데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영세 막걸리 업체들이 난립해 위생 및 질을 보증할 수 없는데다 곡주 특성상 유통기한이 짧아 수출에도 제약이 많았다.

막걸리 잔의 문제는 이런 여러 난제 중 하나였다. 특히 잔의 문제는 막걸리의 이미지와 관련된 만큼 절박했다. 잔은 그저 잔이 아니었다. 산업 인프라였다. 도로가 있어야 차가 달린다. 잔이 있어야 막걸리 유통이 가능하다. 국가가 술잔을 만든다면 어색한 일이지만 인프라라면 다르다. 그것이야말로 정부가 나설 일이다.

사실 정부보다 먼저 움직인 건 주류 업계와 레스토랑 업계였다. 이해당사자인 이들은 막걸리 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자체 디자인을 개발하고 와인 잔이나 도자기를 활용하기도 했다. 기다리면 그중 하나가 시장의 강자로 살아남을 날이 올 터였다.

문제는 시간이다. 도예가 화가 대학생 혹은 주부가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낼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건 한국식이 아니었다. 한식이 관심을 끌면 세계김치연구소와 토포키(떡볶이)연구소, 한식세계화추진단 같은 걸 만들고 막걸리 잔을 공모하는 게 한국식이다.

그러나 음식은 자동차가 아니다. 한 명의 천재가 멋진 잔을 개발하거나 혁신적 조리법을 발명해 발전하는 게 아니다. 많은 이들이 맛보고 즐기고 감상을 보태 문화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한식이 세계화되지 못했다면 한식 문화가 일천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럴 법도 하지 않은가. 우리의 모든 지적 유산이 그렇듯 음식 문화 역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단절됐다. 그런데도 한식 세계화만 외쳤을 뿐 과연 무엇을 한식이라고 불러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조차 생략했다.

가끔 느린 길이 빠른 길이다. 막걸리 잔도 느린 길을 걸어야 빨리 도착할 수 있다. 관(官)이 정한 당선작 대신, 어느 영리한 레스토랑 주인의 야심작이 인기 막걸리 잔으로 퍼져나가는 날을 꿈꿔본다.

이영미 특집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