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동 칼럼] 犬公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 기사의 사진

“인간이라고 다 개보다 낫지 않다. 개의 품성 근처에도 못갈 사람들이…”

방울이는 두 살 무렵 우리집에 와서 13년 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했다. 몸무게 2.5㎏의 꼬마 요크셔테리어는 ‘이적’ 후 바로 책상 밑에 들어가 닷새 동안을 굶다시피 했다. 환경이 낯설어서이기도 했겠으나 우리 가족은 그것을 주인이 바뀐 데 대한 초강경 항의 단식투쟁으로 이해했다.

결국 방울이는 거의 빈사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회생했다. 그 뒤로는 더없이 충직하고 서로를 무제한 신뢰하는 우리집 식구가 됐다. 그렇게 시작된 방울이의 새 삶은 비교적 순탄했다. 자기네 애완견을 예뻐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만 방울이만큼 예쁜 개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방울이가 떠난 건 지난해 3월. 사람 나이로 100살쯤 살았으니 천수를 했다. 그리고 엄지손톱만큼의 재가 되어 동네 앞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소공원 시눌대 숲과 그 옆 잔디밭의 흙으로 돌아갔다. 생전, 방울이는 아내와 내가 산보할 때 거의 늘 따라나서 거기서 자주 놀다오곤 했다.

상심해하자 주변 사람들은 나더러 다시 개를 키우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용기가 없었다. 똑같은 방울이를 만나지 못할 뿐더러 설령 만나서 정이 들더라도 반드시 또 있을 이별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엊그제가 방울이 1주기였다. 그 혼이 있으면 필시 기다릴 것 같아서 추모하러 들렀던 공원에는 상큼하게 봄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아직 봄은 아니었다. 흙을 훑어봤지만 어떤 모습으로도 방울이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해 봄까지 거기서 방울이와 함께 봤던 민들레꽃들이 피는 데도 족히 한 달은 더 걸릴 것이다.

방울이는 마지막 날까지 본분을 다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식구들이 너무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온몸으로 부산떤 것은 전날에도 여전했다. 열 살 넘으며부터 좀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개도 늙어가면서 실명할 수 있고 치매를 앓을 수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어찌되거나 치료와 간병 말고는 방도가 없겠다고 각오는 하고 지냈다.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서 애통해하는 이들의 마음 한 켠에는 대개 후회와 감사, 그리움이 깊이 자리한다. 개가 떠나버린 집에서 말 그대로 사랑하던 개도 사람과 다르지 않음은 동고동락해본 사람이면 안다.

방울이를 못 잊는 것은 겉이 귀여웠기 때문만이 아니다. 잘잘못을 일절 각색할 줄 모르는 정직, 가족에 대한 무한 신뢰와 충직은 더 큰 자산이었다. 가족이 귀가할 때마다 벌인 불변의 열광, 처음 보는 사람이 집에 오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는 극성이 때로는 성가시기도 했다.

인간이 ‘개’자(字)를 붙여 하는 쌍소리들은 놓아먹인 잡견의 난잡한 교미가 빌미인 듯하다. 그 개들 세계에서는 일정하게 성장하면 제 어미와 새끼 구분 없이 교미가 이뤄진다. 그것이 개한테만 있는 현상은 아니다. 그런 동물에게는 조물주가 그 수준의 지적능력만 부여해서일 것이다. 개가 새끼를 낳으면 일정 기간 극진히 보살피는 것만 봐도 그렇잖은가.

바꿔 말해 개한테 도덕의 잣대를 갖다대는 것은 인간을 기준으로 개의 도덕성을 판정하는 것이다. 죄의식은 인간의 과제일 뿐이다. 개들 입장에서 그것은 문제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개보다 나은 것도 아니다. 배신, 배은망덕을 밥 먹듯 하는 인간부터 당장 수두룩하다. 성문란이니 외설이니로 따지면 일부지만 인간의 탈을 쓰고서 더 구정물 같고 사악하기조차 한 부류 또한 부지기수다. 잔뜩 점잔빼는 매스컴에서 마구 쏟아내는 각양의 ‘창의적’ 불륜 작품만 해도 널브러져 있다. 그런 막장 픽션은 아주 상당 부분 실제상황이기도 하다.

성범죄자들 중에서야 말할 것 없고, 그들을 포함해서 돈 많고 유능한 인텔리에 이르기까지 개 근처에도 못 갈 품성을 지닌 인간이 어디 한 둘인가. 그래서 말인데 우선은 걸핏하면 개를 모독하는 언사(言辭) 자정운동이라도 펼치면 좋겠다. ‘개××’류(類) 욕설은 물론이고 개소리, 개나발, 개판, 개차반, 개망신, 개 같은, 개보다 못한 따위의 말만 걸러내도 사회는 한결 푸근해질 것 같다.

한석동 편집인 jerome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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