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정진영] 떠나는 총재… 오는 총재 기사의 사진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1997년 가을, 이른바 ‘한은법 파동’이 한창일 때였다. 한은 출입기자로서 취재원이었던 이성태 당시 한은 기획부장을 가까이, 자주 접하게 된 것이다. 그때 재정경제원은 은행감독원을 한은으로부터 분리, 한은의 금융감독 기능을 빼앗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은법 개정안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에 맞서 한은 직원들은 거리로 나서면서까지 치열하게 저항했다. 양측의 싸움은 주로 국회와 언론을 상대로 한 여론전이었다.



같은 언론사 선후배끼리도 ‘재경원과 한은’이라는 출입처에 따라 서로 입장을 달리하며 때로는 언성을 높일 정도로 양측의 입장 차이는 컸다. 당시 이 총재는 한은의 전선을 실무적으로 총 지휘하고 있었다. 재경원의 파트너는 현 기획재정부 장관인 윤증현 금융정책실장이었다.

인자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선한 인상과 달리 한은법 개정 반대 성명을 독자적으로 발표하는 등 강단 있는 행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 ‘중앙은행 독립투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한은에 대한 사랑을 일찍부터 ‘야성(野性)’으로 드러냈다. 이런 까닭에 상당수 선배들은 그를 아꼈고, 많은 후배들은 그를 따랐다. 가까이서 본 이 총재는 한마디로 중앙은행 DNA로 똘똘 뭉친 골수 ‘한은 맨’이었다.

이성태 총재가 이달 말로 물러난다. 역대 22명의 한은 총재 가운데 불명예 중도 퇴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총재 임기 4년을 포함해 42년 2개월을 근무한 최장수 한은 맨인 그의 삶은 평탄했다.

물러나는 이성태 총재의 회한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금리 인상을 둘러싼 정부와의 갈등으로 그는 항상 힘들어했다.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불릴 만큼 그의 최우선 지론은 ‘물가 안정’이었다. 한은법에 명시된 한은의 존립 이유가 물가 안정인 만큼 그는 ‘물가 안정 없는 성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논리를 일관되게 주장했다. 지난해부터 시중의 과잉 유동성을 우려한 그는 시장에 금리 인상 ‘신호’를 여러 번 보냈지만 모두 ‘시그널’로 끝내야 하는 좌절을 맛보고 중앙은행 총재직을 떠나게 됐다.

이 총재가 떠나는 한은에는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몰아닥칠 것으로 보인다. 16일 후임 김중수 총재가 발표된데 이어 다음달에는 총재를 제외한 6명의 금융통화위원 중 2명의 임기가 끝난다. 통화신용 정책의 수장이 바뀌고 이를 의결하는 금통위원 상당수가 바뀌면서 중앙은행의 향후 행보가 어떠할지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니 만큼 한은 직원들의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전언에 따르면 마치 ‘폭풍전야’와 같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들면서 다소 경직되기 시작했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리 인상 여부를 둘러싸고 정부와 한은의 ‘기싸움’에서 한은이 밀리기 시작하면서부터 한은 직원들이 더욱 위축됐다는 지적이다. 80년대 중반까지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로 불리던 그때의 자괴감을 갖는 직원이 많다는 얘기도 들린다. 지난해에는 전도유망하던 한 중간 간부가 대학이나 국책 연구기관도 아닌 민간 경제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내부 직원들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경기부양-물가’ 해법없는 전쟁

이런 측면에서 보면 김중수 새 총재를 바라보는 한은 직원들의 평가는 엇갈린다. 신임 총재가 정부와의 소통이 강점으로 꼽히는 만큼 침체된 한은 분위기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우선 드러난다.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가졌던 이성태 총재에 비해 청와대와의 교감이 뛰어나다는 점이 한은 위상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평가다. OECD 대사 등을 역임, 오는 11월 G20 정상회의를 원활히 치룰 것으로 기대되는 것도 장점으로 꼽는 직원도 많다.

신임 김 총재에 쏠린 눈·눈·눈

다만 민간 쪽 경험이 다소 부족하며 실물 금융 분야가 약하다는데 직원들은 우려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은도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평소 소신으로 볼 때 ‘중앙은행 독립성 의지’ 부문에 대해서는 그렇게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다.

경기를 부양하려는 정부와 물가를 통제하려는 통화 당국은 항상 긴장과 견제의 끈을 맞잡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일방의 힘을 행사할 경우 결국에는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하고 만다. 시장을 중시하는 외국 금융기관들이 한국 중앙은행의 위상과 총재의 독립성 유지를 주시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신임 김 총재가 무엇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숙고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정진영 편집국 부국장 jy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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