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정수익] 봄(春)은 봄(見)이다 기사의 사진

요 며칠 출근길이 더뎌졌다. 집을 나서면서 눈에 띄는 여러 가지 볼거리에 발길을 붙들려서다. 차가운 땅을 헤집고 삐죽삐죽 올라오는 새싹과 메마른 나뭇가지를 비집고 꼬물꼬물 올라오는 새순들이 마냥 신기하다. 하루하루 생기를 더해가며 개화 준비를 하는 철쭉 개나리 등이 대견스럽다. 그런 차에 지난 주말 찾은 제주도에는 이미 매화 동백뿐 아니라 목련 벚꽃 유채꽃 등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봄이다. 아직도 찬바람이 제법 매섭건만 봄은 어느새 녹색 빛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지나쳤던 봄이 새롭게 느껴지니 자꾸만 묘한 감상에 젖어든다. 어쨌든 봄이 느껴지니 참 볼 게 많아졌다. 아니, 볼 게 많아지고 나니 봄이 느껴졌다.

문득 봄(春)은 봄(見)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 사이가 무관치 않을 것 같아 여기저기를 뒤지다 단서를 잡았다. 봄의 어원에 관한 여러 설 가운데 동사 ‘보다’에서 나왔다는 내용을 찾았다. 밝고 활기 넘치게 소생하는 모습을 ‘새로 본다’는 뜻에서 ‘새봄’이었다가 ‘봄’으로 줄었다는 설명이다. 어원이야 무엇이면 어떤가. 봄은 보는 계절이다. 볼 게 많은 때다. 그러니 많이 보라는 뜻이다. 겨울이 눈을 닫아버린 세상이라면, 봄은 눈을 뜨고 보는 세상이다. 지금부터라도 보자. 많은 걸 보자.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멀리 떨어져서도 보자. 물끄러미 보기도 하고 진지하게 보기도 하자. 봄이 어떻게 와서 어떻게 가는지를 보자. 죽어 있던 대지가 어떻게 싹을 틔우고, 삭막한 나무 줄기가 어떻게 꽃을 피우는지를 보자. 움츠렸던 생명체들이 기지개를 켜고 활동하는 모습도 보자. 보고 또 보자. 우리가 보아야 봄이 더욱 자신의 모습을 뽐내며 원숙해질 것이다.

육신의 눈으로만 볼 것인가. 마음의 눈으로도 보자. 마음의 눈을 열어 나 자신도 보고 주위도 둘러보자. 나만 생각하고 내 것만 챙기고 있지 않는지 보자. 나 자신의 부족하고 못남을 꿰뚫어 보자. 그리고 주위 어려운 이들을 보자. 어디 외로운 이는 없는지, 아픈 이는 없는지, 굶주리는 이는 없는지 따뜻한 눈으로 돌아보자. 무엇보다도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는 없는지 정갈한 눈으로 살펴보자.

여기서 그칠 것인가. 영의 눈도 뜨고 보자. 내가 무엇을 바라며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 누가 지금의 일을 하게 하는지를 보자. 삼라만상을 주재하시는 절대자를 보자. 이기심, 교만, 탐심 등에서 눈을 돌려 구원자를 바라보자. 성경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나온다.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고, 의심과 변덕에 익숙한 이들이다.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기를 바라지만 좀처럼 해내지 못하는 이들이다. 특히 예수님께로부터 부활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서 동행하고 계신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이들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어떤 제자들보다도 친숙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도 뒤늦게 예수님의 도움으로 뜨거운 가슴을 얻고 주님을 보게 됐다. 비로소 영의 눈이 열린 것이다.

그 시대 못지않게 이 세상이 참으로 어지럽고 어둡게 느껴질 때가 많다. 너도 나도 영의 눈이 감겨 있다. 영의 안목을 열어 육안과 심안으로 보이는 것 너머의 참 소망을 바라보자.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심히 어렵다. 그래도 해보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 보자. 조급함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조용히 말씀으로 돌아가 보자. 사순절이 깊어간다. 얼마 안 있으면 고난주간을 거쳐 대망의 부활절을 맞는다. 영의 눈을 부릅뜨고 예수님 고난을 체휼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다.

싹이 돋고 꽃이 핀다고 봄이 아니다. 개구리가 깨어나고 철새가 돌아왔다고 봄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볼 때에야 비로소 봄이다.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눈을 열고 보게 될 때 봄인 것이다. 보기를 원하는 것, 보고자 노력하는 것, 그래서 내 안에 숨어 있는 절대자와 나 밖의 나를 결합시키는 것, 그것이 진정한 봄(見)이면서 봄(春)이 아닐까.

정수익 종교부장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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