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포럼-홍덕률] 성찰하는 삶, 성숙한 사회 기사의 사진

개인이나 조직이나 사회나 완벽할 수는 없다. 누구나 어떤 조직이나 부족하고 실수하기 마련이다. 당연히 부족하거나 실수하는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겸허하게 돌아보고 진정성 있게 성찰하는 자세다.

성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개인이든 기관이든 자신의 존재 이유요 본질이다. 존재의 목적에 충실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늘 실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숱한 문제들도 각 개인과 기관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정치권은 정치의 본질, 정치 본연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정치의 본질은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통합하며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아 궁극적으로 국민을 편하게 하는 데 있지만 우리 정치는 지나치게 권력투쟁과 편싸움에 가까이 있다. 그래서 정치는 국민에게 늘 불편한 것으로, 천덕꾸러기로 인식되기조차 한다. 정치인이 갈등하는 국민을 걱정하기보다는 국민이 갈등 부추기는 정치인을 더 걱정하는 게 우리 현실인 것이다.

존재의 목적에 충실해야

실은 경제도 그렇다. 공정한 경쟁과 합리적 효율성 추구야말로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일 텐데, 우리 사회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윤 추구, 심지어 공동체 파괴적인 탐욕이 마치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인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답답한 현실에 경제인과 국가 경제를 운용해 온 경제 관료들의 책임이 없지 않은지 돌아봐야 할 때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더 큰 걱정은 다른 데 있다. 정치인과 경제인이 자신의 본질과 본연의 역할에서 일탈하는 경우를 나무라고 바로잡으며 우리 사회 전반의 성찰을 주도해야 할 언론과 교육, 종교마저도 자신의 존재 이유와 본질에서 너무 멀어져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언론인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소통을 가로막고 사회 정의에 둔감한 경우다. 스스로 대단한 권력이 되어 자의적으로 재단하기 일쑤고, 심지어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과 결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불의한 기득권 구조를 재생산하는 일에 정파적으로 개입하려고까지 한다.

교육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정하기 고통스럽지만 교육자가 오히려 비교육적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의 창의력이 파괴되고, 교육자들에 의해 아이들의 인격이 상처받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교육자들에 의해 아이들이 자기만 아는, 성찰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커 가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실은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본질적으로 성찰적이어야 하고 따라서 성찰하는 사회의 주역이어야 할 종교인이 오히려 독선과 아집에 빠져 신과 신의 위대한 가르침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도 예외이지 않다.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이가 누구인지, 하나님 나라 건설에 가장 큰 장애는 누구인지, 슬프지만 기독교인 자신, 교회 나아가 성직자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때다.

언론·교육·종교의 책임 커

한마디로 언론인도 교육자도 심지어 종교인마저도 자신의 존재 이유와 본질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인 것이다. 자신은 물론 사회 전반에 대한 성찰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언론인과 교육자, 종교인마저 정치권과 경제계의 잘못을 꾸짖지 못하고, 그 잘못들에 휩쓸리면서 영합해 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이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본질을 좀더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 특히 언론인과 교육자와 종교인이 그런 성찰운동에 앞장서는 것, 그래서 우리 사회의 성찰 문화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야말로 혼탁한 이 세상을 바로잡고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감히 성찰하는 삶, 성숙한 사회를 제안해 본다.

홍덕률 대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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