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동 칼럼] 초계함 참사, 만개한 언론자유 기사의 사진

“군사작전까지 막무가내로 중계방송하는 언론… 보도를 위한 보도 가려내야”

자식을 군대 보낸 마음보다 애틋한 것이 있을까. 직업군인을 자원한 경우도 비슷은 하겠으나 병역의무를 완수하러 입대한 것과는 비교할 바 못된다. 아이를 군문에 들여보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찡한지는 ‘군인가족’이 되고부터 거리에 왜 갑자기 군인이 이렇게 많아졌나 싶은 데서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자식을 군에 보내본 사람들만 안다.

천안함 침몰 비보를 접하고서 실종 승조원 가족 친지들이 겪는 어처구니없음과 통탄, 분노를 필설로 어찌 표현하겠는가. 말 그대로 망연자실일 터이고, 그 부모들에게는 자식이 살아 돌아오는 것 외에 세상의 어떤 위로도 위안이 될 리 없다.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밖에 길이 없다면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 부모는 자기 목숨도 기꺼이 버릴 것이다.

10여년 전, 강릉 앞바다에 잠수함을 타고 내려온 북한 무장공비 26명이 부근 산악으로 도피·침투한 사건이 있었다. 국군은 며칠에 걸쳐 공비들과 숨막히는 교전을 벌였다. TV방송들은 전황을 실시간 생중계했고, 밤에도 작전지역에서 막무가내로 조명을 밝혀가며 속보경쟁을 했다. 이건 보통 넌센스가 아니다. 국군 피해는 그래서 더 컸고, 일부 공비는 퇴로를 확보해 북으로 달아났다.

천안함 침몰사건이 어디까지 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현재로서는 미스터리 투성이라 최악의 경우 영구미제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터여서 공비 침투 때를 능가할 만큼 보도경쟁도 치열하다. 숱한 유사언론을 포함해 대다수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 충족과 언론자유를 만능키 삼아 무제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능력이 닿지 않아서 못하지 사실상 그들은 쓰고 싶고 말하고 싶은 대로 다 한다. 센세이셔널리즘, 무지, 무책임이 도를 더해가는 것은 필연이다.

취재보도 열정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흥행물 경연하듯 벌이는 과잉 과장보도를 주목하는 것이다. 해군 2함대사령부 근무병들이 실종자 가족 친지들의 부대 진입을 저지하는 과정을 다룬 보도만 해도 그렇다. 황망히 달려간 가족 친지들의 절규 항변은 당연하다 할 일이지만 언론이 다짜고짜 “총구를 겨누고” 운운하며 설익은 보도를 감행한 것은 냉정한 파수꾼의 자세와 거리가 멀다.

이번 같은 초대형 사건 보도에 어설프게 등장해 혼란을 부채질하는 ‘단독보도’ 형태의 구태도 정돈이 필요하다. 예컨대 해난구조대(SSU)를 언급하면서 병력과 주둔지까지 완벽하게 설명한 것은 언론자유 범주를 넘은 방종이다. 비판 견제 감시가 언론의 중요한 사명 중 한 부분임은 분명하나 이번 침몰참변 보도에서도 그걸 매개로 이념 편향에다 상업저널리즘에 도취한 예가 적지 않다.

사안의 민감성에 편승해 극도로 감성을 자극한 사례는 지난해 몇몇 인사의 장례 과잉 보도에서 경험했다. 그때는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한쪽으로 말고는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문득 말로만 있는 검찰 포토라인을 생각한다. 주로 비리 혐의와 관련해 대검찰청과 서울중앙검찰청에 조사 받으러 드나드는 거물들이 기자들에게 치르는 ‘신고식’ 말이다. 세상에 그런 난장판, 아수라가 또 있을까. 대개 녹음 녹화용으로 기자가 달라붙어 묻는 말은 “소감이 어떤가” “혐의를 인정하나”가 거의 전부다. 답변은 없거나 딱 잡아떼는 것이 공식이다.

오래 전에 전설이 됐어야 할 활극이 지금 같은 문명세계에서 더 완악스럽게 반복되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물론 그것도 보도의 한 부분이기는 하다. 문제는 딱하고 알맹이 없는 취재관행이 어째서 끝없이 세습되고 있느냐다. 투철한 직업의식 측면에서는 일부 평가받을 수 있겠으나 단언컨대 그것을 기자정신의 본질로 치하해 마지않는 사람은 없다.

천안함 침몰은 분명 하늘도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의 사변이다. 이런 때 언론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것 또한 말할 나위 없다. 언론 종사자들은 과장 과잉에다 왜곡까지 녹여 넣는 보도를 삼가고, 뉴스 소비자들은 ‘보도를 위한 보도’따위를 세밀하게 가려내야 한다. 보편적이고 불편부당한 보도와 애민 애국적 보도는 낱개가 아니다.

한석동 편집인 jerome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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