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드라마 ‘아이리스’의 그 호수엔 숨져간 조선인 恨이 흐르고 있었다 기사의 사진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

③ 아키타현 대표 징용 기업 도와홀딩스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 다자와(田澤)호는 거대했다. 일본 아키타(秋田)현 센보쿠(仙北)시에 있는 이 호수를 한 바퀴 돌려면 시속 20㎞로 달리는 차에 한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 호수는 최대 수심 423.4m로 일본에서 가장 깊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지난해 말부터 이곳에 몰려들고 있다. 드라마의 위력이다. 지난 1월 29일 눈 덮인 호숫가 관광객 20여명은 죄다 한국 사람이었다. 50대로 보이는 남녀는 황금색 여인상(女人像·다쓰코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충북 청주에서 왔다는 박모(57·여)씨는 근처 조선인 강제징용 현장을 아느냐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가이드가 아무 말 않던데.”

1930년대 후반 들어 일제는 심각한 전력난을 겪는다. 군수물자 생산에 전기는 필수다. 도처에서 발전소 건설 공사가 시작됐다. 다자와호 주변은 수력 발전이 채택됐다. 상류 강줄기를 호수로 연결한 뒤 호수에서 다시 하류로 물을 내보내 낙차를 이용한다는 아이디어였다. 강과 호수를 잇는 도수로 공사에 조선인 약 2000명이 동원됐다. 공사 기간은 1938년 2월부터 1940년 1월까지. 이렇게 만든 ‘오보나이 발전소’는 현재까지 가동 중이다.

여러 기록과 현지 일본인 증언에 따르면 전체 길이가 약 8.5㎞인 도수로는 주로 사람 손으로 만들어졌다. 노무자들은 곡괭이와 삽으로 흙을 파냈다. 자재를 나를 때도 마차나 뗏목 등 원시적 수단을 썼다. 일제는 겨울에도 쉬지 않고 공사를 진행했다. 암벽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는 일은 조선인에게 돌아갔다. 많은 조선인이 공사 중 숨졌다고 한다. 추위와 굶주림도 삶을 앗아갔다.

다쓰코상에서 호숫가를 따라 약 6㎞ 떨어진 곳에 ‘히메관음상(姬觀音像)’이 서 있다. 공사로 숨진 물고기를 위로한다는 글이 관음상 앞에 적혀 있다. 산성인 강물이 호수로 유입되자 토종 물고기가 괴사했던 것이다. 관음상은 1939년 11월 건립됐다.

그런데 1990년, 도수로 공사에서 숨진 희생자를 위로하는 게 관음상 건립의 더 큰 목적이었음이 밝혀졌다. 인근 사찰 덴타쿠지(田澤寺)에서 ‘히메관음상 건립 취의서(趣意書)’가 발견된 것이다. 다자와호 주변 마을 사람들은 1991년 9월 22일 히메관음상 앞에서 처음으로 위령제를 열었다. 조선인 희생자를 위로하는 행사였다. 위령제는 그 뒤 해마다 치러진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연구가들에게 현지 강제동원 현장을 소개해 온 차타니 주로쿠(69) 전 민족예술연구소 소장은 “이곳이 양국 우호·친선의 상징적 장소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다자와호에서 아키타 내륙선 열차를 약 1시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간 뒤 다시 자동차로 40여분을 가면 옛 하나오카 광산의 흔적이 나온다. 비철금속 분야 대기업인 도와홀딩스㈜의 전신 ‘후지타구미(藤田組)’가 소유했던 곳이다.

갱도 입구는 유별나게도 약 40m 높이 야산 위에 있다. 산을 종단으로 뚫는, 이른바 수직갱이다. 다른 광산은 오래 전 폐광됐고 수직갱만 남았다. 옛 조선인 숙소 터에는 눈이 1m나 쌓여 있었다. 일본 후생성 명부 등에 따르면 하나오카 광산으로 조선인 2700명 이상이 강제 동원됐다. 일부 생존자는 약 4000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야산 정상 수직갱에서 조선인은 지하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 광석을 캤다. 배고픔과 학대는 물론 중력에 맞서야 하는 고통이 더해졌다.

1944년 5월 29일 하나오카 광산 나나쓰 다테 갱도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갱이 붕괴돼 지하수가 쏟아져 나왔다. 수몰된 갱 안에 있던 조선인 11명과 일본인 11명이 숨졌다. 이른바 ‘나나쓰 다테’ 사건. 희생자 22명은 아직도 광산 근처에 묻혀 있다. 종전(終戰) 후 사고 현장이 노천 채굴터로 개발되면서 유골 발굴은 불가능해졌다.

현장에 세워졌던 추모비는 노천 채굴터 개발 당시 근처 사찰 신쇼지(信正寺)로 옮겨졌다. 추모비 뒷면에는 숨진 조선인 이름이 창씨(創氏)로 적혀 있다. ‘山田魯元(朴魯元)’ ‘江川龍伊(韓龍伊)’ ‘星山段載(全段載)’ 식이다. 죽어서도 식민지 국민이다. 11명 가운데 3명(崔泰植 林炳山 吳重甲)만 우리 이름이다. 2명은 아직 이름조차 찾지 못했다.

신쇼지에서 자동차로 동쪽 방향 20여분 거리에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광산이 있다. 도와홀딩스 고사카 광산이다. 광산이 한눈에 보이는 뒷산에 올라서자 화학약품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10여분 동안 뒷산에 서 있는데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냄새는 광석이 금속으로 제련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현지인들은 1940년대 악취가 더 심했다고 진술했다. “이곳은 메이지유신(1868년) 때부터 100년 동안 민둥산이었습니다. 유해물질을 배출하기 위해 굴뚝을 만들었는데 유해물질이 담긴 연기가 퍼져나가 나무가 다 죽었죠. 지금 나무가 많은 것은 1970년대 이후 녹화사업 때문입니다.”

지난달 11일 기자와 만난 고사카 광산 징용자 김경용(83·대구 매호동)씨는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이다. 열일곱 살 때 끌려가 1년 남짓 노역에 종사했다. 김씨는 늘 배가 고팠다고 했다. 광산 측이 목욕물을 데워줘도 탈진이 두려워 물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동료 징용자는 스물다섯 살 안팎의 형들이었다. “일본말 못 알아듣는다고 두들겨맞기도 했지만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더 많이 때렸습니다. 이유를 몰랐는데 어느 날 일본인 화차 운전수가 그러더군요. ‘가네모토(김씨의 일본 성), 너는 좀 있으면 군대 간다. 군인 한 사람 양성하려면 20년 걸려. 다치면 안돼’라고.”

김씨는 이 말에서 일본이 온통 전쟁에 미쳐있었음을 실감했다. “참 무서운 얘기 아닙니까.”

인천발 아키타행 비행기는 요즘도 만석이다. 관광객 가운데 선조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통과 차별의 현장은 드라마의 낭만을 추억하는 장소가 됐다. 이건 다만 세월이 가져다준 역설일 뿐일까.

센보쿠·가즈노(아키타현), 대구= 특별기획팀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