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우성규] 개점 휴업 강제동원 조사위 기사의 사진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될 법한 고급 레스토랑에 송로버섯이 준비됐지만 이를 요리할 셰프가 없다면?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이 곁들여질 예정이었지만 코르크 마개를 열고 디캔팅을 해줄 서버가 없다면? 더군다나 손님이 80줄에 들어서서야 생애 처음 큰 돈을 털어 식당에 들어설 용기를 낸 노부부라면? 손님이 애통해함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사람들조차 안타까움을 느낄 것이다.

식재료는 왔는데 요리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강제동원 조사위원회)’라는 총 29자에 달하는 긴 이름의 위원회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던 일본 기업들이 맡긴 공탁금 관련 명부를 지난달 26일 도쿄 주재 한국 대사관에 넘겼다. 총 17만여건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데만 6개월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동안 강제동원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노무동원 사실을 증명해줄 한 줄기 빛 같은 자료다. 이들 피해자 대부분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80대 이상이어서 보상을 서둘러야 한다.

하지만 지난달 22일 통합 기구가 된 강제동원 조사위원회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공탁금 명부를 분석하고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조사해줄 전문 계약직과 조사관 73명은 지난달 25일부로 일괄 계약 만료됐다. 그리고 3주가 지나도록 채용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위원회에는 18명의 간부급 직원과 함께 아르바이트생 몇 명이 이 공탁금 명부를 고작 ‘출력’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5월 18일에는 도쿄 유텐지에 보관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을 고국으로 봉환해 충남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일을 담당했던 유해발굴팀장 역시 공석이다. 위원회의 한 간부는 “담당 팀장이 2주 넘게 월급 없이 그냥 나와서 일을 해 주었는데, 더는 그렇게 해 달라고 할 염치가 없다”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누가 강제동원 조사위원회를 사실상 식물위원회로 방치하고 있는 걸까. 위원회는 원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와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통합해 출범했다. 조사와 지원 기능을 합쳤으나 조사는 6개월씩 두 차례 연장을 포함해 2012년까지만 하게 했다. 그 후에는 보상 지원 업무만 담당한다.

위원회 통합을 다룬 법안이 지난 2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논의될 때부터 논란이 많았다. 왜 굳이 ‘일제강점하’라는 표현을 빼고 ‘대일항쟁기’로 전환해야 했을까. 당시 법안소위에서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은 ‘일제강점하’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자학적이란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이는 17대 국회 때 정문헌 한나라당 의원이 낸 결의안에서 유래했다. 그는 현재 청와대 통일비서관을 맡고 있다. ‘대일항쟁기’란 표현이 능동적이긴 하지만 북한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유래했다는 점은 유감이다.

강제동원 조사위원회의 사령탑인 위원장직마저 공석이다. 정무직 차관급 상근직으로 격상된 위원장 임명권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관련 법이 지난 22일 공포됐으니 이 대통령은 23일째 임무를 방기하고 있는 셈이다.

이 대통령은 독도와 관련,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당시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내용이 일본 요미우리신문 등에 보도돼 곤욕을 치렀다. 서울중앙지법의 1심 판결로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는 점은 인정됐지만 강제동원 조사위원회에 대해 소극적인 모습은 많은 국민을 또 다시 의아하게 만들 수 있다. 열성적인 대통령이 왜 유독 일본과 관련된 부분에서만 대다수 국민을 거듭 ‘기다리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란 말이 있다. 기다리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 짧은 순간이 세 번의 가을이 지난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강제동원 진상 규명과 피해 판정을 기다리는, 못 배우고 가난한 노인들에게 하루는 3년과 같다. 더군다나 올해는 국치 100년 아닌가. 수만명의 피해자와 그 가족,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대통령과 정부를 주시하고 있다.

우성규 특집기획부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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