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의구] 위대한 가족들에 경의를 기사의 사진

50년 만의 뒤늦은 범국민장을 지난 11일 치른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씨는 전북 남원에서 4남2녀를 거두며 살던 평범한 어머니였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셋째 아들이 실종되자 그녀는 마산시청 앞 연못의 물을 다 퍼내는 등 마산시내를 휘젓고 다니며 아들을 찾았다고 한다. 이런 모성 때문에 마산시민들은 김주열의 존재를 알게 됐고 4월 11일 그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자 궐기했고 이는 4·19로 연결됐다. 그해 5월 권 여사는 마산시민 앞으로 편지를 보내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남은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강한 모성은 이렇듯 개인과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 더 큰 의식으로 발전한다. 지난달 26일 천안함에서 산화한 군인들의 가족들도 우리 사회에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그들은 귀한 자식, 하나뿐인 남편을 잃고 슬픔에 몸부림쳤지만 궁극적으로 의연함을 지켰다. 국가를 위해 제복을 택한 군인의 부모·아내로서의 꿋꿋함을 보여줬다.

유가족은 거칠고 찬 해류 속에 수색을 독려하던 한주호 준위의 순직을 대하자 지난 3일 선체 내부 수색과 구조를 원하던 애끓는 요구를 접었다. 아들·남편의 전우인 해군에서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한 준위 가족과도 손을 맞잡고 슬픔을 나눴다. 함미가 인양될 즈음에는 넓은 서해를 훑는 소모적 수색을 멈추고 미처 못 찾은 군인을 산화자로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귀환과 실종이 엇갈리는 와중에 장례를 기다렸다 함께 지내기로 했다.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이미 발견된 시신의 훼손이 심해지자 미귀환 7명의 가족들도 장례 절차를 먼저 진행하는 데 동의하는 동료애를 발휘했다.

원사에서 이병까지 계급이 다르듯 가족들의 계층도 다양했다. 해군을 직업으로 택한 이들의 가족들도 있고, 병역의 의무를 다하면 사회에 돌아온다는 무언의 약속 아래 아들을 해군으로 보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가 조국을 위해 제복을 입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같았고 그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조정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이견들을 이를 토대로 정리하고 정제된 결론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은 더욱 값진 것이다.

이런 유대감은 집단 이기주의로 치닫기 십상이다. 인명사고가 있었던 곳곳에서 지나친 요구조건을 내걸고 생떼 쓰는 모습들을 목도해왔다. 하지만 천안함 희생자 가족들은 중요한 고비마다 냉정을 잃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부산 사격연습장 화재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일본인 관광객들의 유족들이 보여줬던 것처럼 슬픔을 속으로 삼키지는 않았지만 그들 이상으로 사태에 이성적으로 대응했다. 슬플 때 그들은 목 놓아 울었지만, 사랑하는 이들의 명예를 원했기 때문에 조국을 위한 그들의 희생을 받아들였다. 고비마다 절제된 행동과 정제된 결단을 보여줬다. 제복의 가족다운 의연한 모습을 지켰다.

이제 천안함 가족들의 오랜 기다림은 끝자락에 와있다. 함수 인양에 이어 해군장 절차가 시작됐다. 5일간의 의식이 지나면 가족들은 길고 외로운 슬픔을 겪게 될 것이다. 휴대전화 벨이 울리면 반사적으로 ‘혹시나’ 기대를 했다가 곧바로 현실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곤 가슴 한 구석이 미어지듯 아플 것이다. TV에 해군의 모습이나 함정 사진만 나와도 왈칵 슬픔이 치미는 일이 오랫동안 되풀이될 것이다. ‘우리 아들, 나의 남편은 조국을 위해 명예롭게 산화했노라’는 자부심이 가족들이 평안을 찾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장례가 끝나도 우리 가족들이 보여준 행동은 우리 사회에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산화한 군인들에 대한 것과 같은 크기의 경의를 가족들에게 표하고 싶다. 가족들이 보여준 고결한 행동으로 그들의 희생은 더욱 고귀해졌노라, 대한민국은 우리 군인들과 함께 당신들을 결코 잊지 않겠노라고.

김의구 사회2부장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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