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동 칼럼] 서해교전 영웅들은 어디 있는가 기사의 사진

“그들은 대한민국 해군장병이 아니었나. 그리고 국민들은 등신이었던가”

1999년 6월 연평해전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선제포격으로 촉발됐다. 전투는 우리 해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해군은 북한 어뢰정 1척을 격침시키고 경비정 5척을 대파했다.

그로부터 약 3년 뒤 2002년 6월 29일 서해 NLL에 북한 경비정이 다시 나타나 해군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서울에서 열린 한·일월드컵 축구대회 한국-터키 3·4위전 경기에 남한 전역이 열광해 있던 시간이었다. 동해에서는 금강산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이 유유히 북상하고 있었다.

2002년 서해교전(제2 연평해전)에서 해군은 참수리 357호가 침몰하고 25명이 사상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사자는 윤영하 소령,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북한은 경비정 1척이 대파되고 30여명의 사상자를 낸 채 퇴각했다.

이튿날 김대중 대통령은 한가히 도쿄로 날아가 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한 뒤 폐막식에 참석했다. 전사자와 유족들을 위한 대통령 의전은 없었다. 장례식은 해군참모총장 선에서 ‘조용히 알아서’ 치러졌고, 국방장관 합참의장마저 얼씬하지 않았다.

서해교전 전사자들에 대한 최고 예우는 해군 제2함대사령부 영내에 추모비 하나 세운 것이었다. 이후 1년에 한 차례 2함대사령부 주관으로, 있는 둥 마는 둥 치른 추모식은 초라했다. 전임 정권의 ‘햇볕’을 승계한 노무현 정권에서도 한가지였다.

증언자들은 말한다. “아군 피해가 컸던 것은 도발을 해와도 먼저 사격하지 말라는, 청와대 보고부터 하라는, 사실상 그냥 목숨을 내주라는 교전지침 때문이었다.” 유족들이 실의에 빠져 방황하는 사이 서해교전은 국민들의 관심에서 이내 멀어져 갔다. 어느 미망인은 조국에 환멸을 느낀다며 이민을 가버렸다.

사람 목숨, 더구나 서해교전의 숭고한 전사(戰死)에 돈을 갖다대는 것이 예의는 아니다. 그렇더라도 결례를 무릅쓰고 한 번은 짚어야겠다. 그 장병들의 유족이 받은 보상금은 윤영하 5600만원,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3500만원, 박동혁 3000만원, 그것뿐이었다.

2008년 2월 좌파세력으로부터의 정권 교체 후 서해교전 추모는 정부 차원으로 격상됐다. 국무총리와 국방장관 합참의장이 추모식에 참석하고 이민을 떠났던 미망인도 돌아왔다. 나라를 지키다 거룩하게 산화한 용사들과 그 유족에게 외견상으로 최소한의 예우는 갖춰졌다.

천안함 침몰이라는 대참사가 없었다면 혹시 모르겠다. 천안함 격침‘테러’ 이후 애도, 예우, 온정의 거대한 물결을 보면 같은 나라에서 같은 불행을 극복하는 과정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는지 참으로 의아하지 않은가. 서해교전 전사자는 대한민국 해군장병이 아니었던가. 이전에는 국민들도 등신이었다는 말인가.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후 김대중 대통령은 “앞으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2002년 5월에는 김동신 국방장관이 “주적 개념을 땅에 묻겠다”고 공언했다. 좌파정권의 국가안보 핵심 책임자들은 “북한을 의심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도 했다.

그래서? 주적은 소멸하고 전쟁 위험은 사라졌는가. 서해교전은 병정놀이였던가. 천안함 다국적 합동조사단에서 지금까지 나온 조사결과는 ‘테러’ 배후를 거의 결론 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밖에 없는 북한체제의 태생적 한계를 지목하는 것은 건전한 민주시민의 상식이기도 하다.

천안함 침몰 이후 안보태세를 다잡자는 목청이 높다. 10년 좌파정권의 골수 후예들까지 가세해 보수정권의 안보 무능과 군 기강 해이가 화를 불렀다고 질타한다. 액면대로는 아니라도 경청할 이야기다. 그런데 낯이 있어야지 최소한 그들은 침묵이라도 하는 게 예의일 것이다.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조롱을 했다. “합리적 보수든 따뜻한 보수든 별놈의 보수를 갖다놔도 보수는 바꾸지 말자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얼치기 진보와 진보로 덧칠한 좌파가 또 국정완장 차고 설치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 빨라도 통일이 되기 전에는.

한석동 편집인 jerome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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