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인사이드-전정희] 김영임을 만나다 기사의 사진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만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여인네의 애절한 ‘한 오백년’ 소리에 눈물짓지 않을 수 없다. 저 여인, 작은 몸피에서 고목의 뿌리 소리를 뽑아 부모들을 울린다. 그녀, 5월이면 어김없이 효 공연을 한 지 16년이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인도’ 얼굴선이 그대로 살아 있는 조선 미인이다. ‘동백기름 먹인다’는 말을 알아듣기 쉽지 않은 세대가 대부분인 이즈음이건만 그녀는 여전히 동백기름 곱게 먹인 머리로 ‘늙은 부모’를 만난다.

경기민요 명창 김영임. 그는 올해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다. 어느새 혼기를 꽉 채운 딸을 둔 쉰다섯의 나이가 됐다. 트로트도 아닌 국악으로, 그것도 후원 없이 매표만으로 지금까지 이어왔다. 더구나 근년 들어 신종 플루,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천안함 사건 등 굵직한 이슈가 공연계를 강타했음에도 그 열정을 막지 못했다.

김영임은 우리나라 효 공연의 개척자다. 어버이날을 목전에 두고 트로트 가수들이 다투어 무대에 서지만 모두 그가 닦아놓은 길의 도움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15년 전 경로잔치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그녀의 효 공연을 지켜봤고, 그 무렵 오스트리아 빈의 해외 공연에서 조선미인 소리에 매료된 서구 관객의 환호성도 들었다. 지난 주말 실로 오랜만에 의정부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만났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여인에서 ‘어머니’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요즘 천안함 어머니들 때문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우리 어머니가 우시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곤 했다. 천금 같은 자식을 그렇게 떠나보낸 어머니들.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쌀밥과 소고기무국으로 마지막 밥상을 차린 고 이상민 하사의 어머니가 “김치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무국 먹고 속이라도 뜨뜻하게 달랬으면 좋겠다”라는 탄식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 명창도 TV를 못 보겠다고 했다. “나라 지키다 평생 한을 남겼으니 누가 그 부모를 위로할 수 있겠는가. 내 소리가 당신들을 위한 기도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덧붙였다.

‘효도용역’이란 조어가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효도를 짐 지우는 일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관절 수술을 하고 난 직후 용역 주어선 안 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늙으신 것이 그제야 보였다.

그리고 첫 번째 한 일이 지난해 김영임 효 공연을 부모 모시고 본 일이었다. 대개의 관객은 아픈 다리로 힘겹게, 더러는 휠체어를 타고 입장했다. 그날 그 환한 부모님의 표정에 속으로 민망함을 감춰야 했다. 김 명창은 “가족 단위로 보는 관객이 늘었다. 그래도 내 공연에 오시는 어르신들은 형편이 나으신 분들이다”고 했다. 이런 안타까움 때문인지 그는 강원도 태백시 경로당을 모두 돌며 냄비로 장단 맞춰 위로잔치를 벌이는 것과 같은 예정하지 않은 행사를 끊임없이 갖는다.

우리 어머니는 요즘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공연을 뒤지는 일이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국립극장의 창극 ‘청’, 모노드라마 ‘염쟁이 유씨’,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뮤지컬 ‘친정엄마’ 등을 비롯해 적잖은 볼거리가 있다. 나름 팁도 생겼다. 부모는 당신 정서에 맞는 볼거리만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가을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축구 국가대표 평가전 관람은 그런 광경을 처음 접한 어머니에게 판타지처럼 비쳐진 듯했다.

부모 모시는 일은 저마다 사정이 다르다. 거동이 쉽지 않은 부모인데도 한 동네서 따로 사는 나의 경우도 그렇다. 그러나 성서의 말씀처럼 부모를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김 명창은 “어머니 살아계실 적 따뜻한 목욕물에 들어가시며 행복해하던 모습이 너무나 그립다”고 했다. 그녀의 소리가 세상 어머니들을 위로하는 공기(公器)가 되는 이유일 것이다.

전정희 인터넷뉴스부장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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