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김지방] 그리스 위기 감상법 기사의 사진

이상한 풍경이다. 돈을 빌리는 사람은 받기 싫다고 하고, 돈을 빌려줄 사람도 마뜩잖아 하는데 제3자들이 오히려 “반드시 거래가 성사돼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세계 금융시장에 카오스(Chaos)를 불러온 그리스 이야기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의 구제금융으로 겨우 숨을 돌린 것 같다. EU는 별도로 대한민국 1년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액수의 비상금을 마련하는 극약처방으로 시장에 대응했다. 하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이제부터 공기업 민영화와 대규모 해고, 임금과 연금 삭감 등 가시밭길을 가야 한다. IMF사태를 10여년 먼저 겪은 우리의 입장에서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리스 국민들은 돈을 안 받겠다고 아우성이다. 아테네는 양대 노동조합의 격렬한 시위로 불타올랐다. 젊은이들과 공무원이 시위 제일 앞줄에 서서 화염병을 치켜들었다. 지금까지 돈을 펑펑 쓴 사람들은 은퇴를 앞둔 기성세대인데, 왜 한참 일해야 할 우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절규했다.

독일 국민들도 돈 내기 싫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독일은 그리스 구제 금융에 가장 많은 돈을 내놔야 할 처지다. 독일 국민들은, 그리스 국민들이 방만하게 돈을 쓰다가 저 꼴이 됐는데 왜 우리가 그 부담을 져야 하느냐고 항변한다.

채권자도 채무자도 모두 원하지 않는 이 거래, 왜 성사됐을까.

그리스와 EU의 거래 성사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쪽은, 그리스 국채를 사들인 금융회사들이다. 그 명단에는 독일의 히포레알에스테이트(78억 유로어치 그리스 국채 보유), 코메르츠방크 산하 유로히포(31억 유로)가 앞자리에 있다. 영국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17억 유로),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30억 유로), BNP파리바(50억 유로)의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포르투갈 스페인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이른바 ‘PIIGS’ 국가도 392억 유로가 물려 있다. IMF와 EU의 구제금융으로 구한 것은 이 금융회사들이다.

투자 실패의 책임은 투자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시장의 원리다. 유럽의 금융회사들은 그리스 국채를 사들여 결국 방만한 재정 지출을 도왔고, 결과적으로 지금의 혼란을 부채질한 셈이다. 이들 그리스 국채 투자자들은 “시장의 파국을 막아야 한다”면서 사실은 자신들의 파국을 막기 위해 그리스와 독일, EU 국민들을 동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스가 IMF-EU의 구제금융을 거부하면 국민들은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른바 경제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매일 신문과 방송에서 그런 설교를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건 엄밀히 말하면 제3자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가 IMF체제로 가느냐 마느냐는 사실 그리스 국민이 결정할 일이다. 솔직히 EU의 경제위기도 제대로 예측 못했던 그 전문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리스가 어떤 나라인가. 민주주의의 발상지다. 시민의 투표로 권력을 결정하는 시민사회를 지구상에서 처음 만들어낸 국민들이다. 우리가 민주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리스 국민들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진 못하더라도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아테네가 화염병으로 불타오르는 저 모습은, 어쩌면 시장의 혼란 속에서 인류의 민주주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광경은 아닐까.

금융 불안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는 것 아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EU의 구제기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EU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그나마도 금융 불안이라는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항생제를 마구 투입한 임시 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국면이 지나면 EU 국민들은 막대한 규모의 국가 부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해결된 건 없다.

금융 시장에는 ‘서킷 브레이크’라는 게 있다. 혼란스러울 땐 잠깐 멈추자는 제도다. 지금은 가는 방향을 멈추고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카오스’라는 단어도 천지 창조 이전의 혼돈을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혼란에 처한 이 카오스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잉태되고 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김지방 국제부 기자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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