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인사이드-정철훈] 슬픔의 분배 기사의 사진

‘1960년 1월 4일 오후, 수많은 알제의 기자들이 카뮈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자 리옹가 93번지 아파트로 몰려들었다. 그녀가 아직 아들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했음을 알고는 주소를 잘못 안 것 같다며 그 자리를 떠났다.’(‘카뮈의 마지막 날들’-조제 렌지니·문소영 옮김)

파리 근교의 한 국도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카뮈의 소식이 전해진 알제의 고향집 풍경이다. 당시 카뮈는 47세였다. 3년 전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카뮈는 인생의 황금기가 보장되어 있을 때 세상을 떴다. 그런 만큼 북아프리카 알제에 살고 있는 카뮈 어머니에 대한 취재는 기자들에게 불가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예상치 않은 방문에 뜨악한 눈을 치켜뜬 어머니 앞에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알제의 기자들에게 카뮈는 살아있을 때나 사후에나 뉴스의 진원지였지만 그 어머니 앞에서는 저널리즘보다 휴머니즘을 선택했던 것 같다. 카뮈의 어머니는 문맹에다 거의 귀머거리 상태였다. 자식의 죽음을 통보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고도 난처한 일이다.

돌이켜보면 유난히 사망 기사가 많았던 비탄과 비통의 계절을 통과해왔다. 4·19, 5·18, 6·25로 이어지는 비극의 기념일 앞에 우리는 3·26 천안함 침몰의 역사를 보탤 수 밖에 없다. 카뮈의 경우가 개인적 죽음이면서도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면 천안함 희생자들은 사건 발생 순간부터 공적인 죽음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다. 국방의 의무를 짊어진 작전 중의 병사라는 점에서 그들은 어머니의 아들이기에 앞서 국가의 아들이었다.

이에 덧붙이자면 그들에 대한 추모 역시 국가 차원이 먼저였고 희생자 가족들의 추모는 그 후순위로 자리매김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체 발견 전에 보상과 장례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니 그들에 대한 추모는 이미 가족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으로 번져들었던 것이다. 죽음의 분배 혹은 슬픔의 분배라고 할 만하다.

국가 차원의 보상과 묵념이 그들의 영정 앞에 바쳐졌지만 어머니의 슬픔은 줄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는 슬픔이라는 표면적 어감보다 더 큰 침묵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 차원의 거대한 묵념이 끝나고 나면 곧 시대가 바뀌게 되리라는 것, 즉 아들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어머니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국가 차원의 추모와 보상이 이루어졌다 한들 희생자의 어머니들은 자식 잃은 슬픔이 엄습할 때마다 자신에게 억압된 것들이 전혀 해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억압된 것들이 회귀하는 순간들은 이렇듯 국가의 통제밖에 있다.

49재도 끝나고 보상도 매듭지어지는 단계다. 그러나 슬픔은 해소되지 않는다. 게다가 국가 차원의 예우나 보상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한숨 앞에서 티끌처럼 가벼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어머니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적 추모 앞에서 억눌러야 했던 개인적 슬픔, 그리고 차마 말하지 못했던 양심적 부당함이나 불편함에 대해 견디지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가적 추모가 끝나고 나서야 어머니는 자신에게 다가온 슬픔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이 지점이 감성의 회복인 것이다. 사람들이 감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세상의 수많은 사건과 알 수 없는 정보 속에서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카뮈는 유작이 되고 만 미완성 원고 ‘최초의 인간’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을 결코 읽지 못할 당신에게…’ 여기서 당신이란 문맹의 어머니다. 카뮈는 모든 명예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노벨문학상이라는 명예를 거머쥐었지만 마음속은 알제의 여전히 낡고 좁은 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는 귀머거리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으로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아들, 아니 자식의 모든 삶은 어머니에게 헌정된다. 지상에서 들이쉬었던 마지막 숨까지도.

정철훈 문화부장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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