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정수익] 뻔뻔한 세상 기사의 사진

퇴근길 만원버스 안이었다. 어디선가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귀를 쨍쨍 울렸다. 뒤쪽 자리에 앉은 20대 여성이 핸드폰으로 통화하고 있었다. 족히 10분을 넘겨도 통화는 끊길 기미가 없었다. 슬슬 짜증이 날 무렵, 한 아저씨가 혼잣말로 한마디 했다. “거 참 뻔뻔스럽네.” 절묘한 표현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상황에 맞는 것 같았다. 승객들에게 폐를 끼치고도 태연한 그녀는 분명 뻔뻔했다.

한 인물이 떠올랐다. 영업사원인 그는 최근 거금의 회사 돈을 교묘한 수법으로 횡령했다. 거기다 대출 보증 등으로 동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도 ‘배 째라’며 버티고 있다. 그러고 보니 뻔뻔한 이들이 참 많다. 아니, 세상이 온통 뻔뻔스러운 듯하다. 새치기를 하고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이,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슬쩍 버리고 뒷짐 지는 이, 다른 사람의 글을 표절하고서 떳떳이 행세하는 이, 불륜을 저지르고 도덕이니 윤리니 따지는 이, 개혁세력으로 포장하고는 돌아서서 갖은 부정을 저지르는 이….

그래도 일반인들의 뻔뻔함은 적당히 넘길 만하다. 국회 안 ‘금배지 나리’들의 뻔뻔함은 말로 다 못한다. 선거 때면 납작 엎드려 표를 달라며 애걸복걸하다 당선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행세한다. 여기저기 ‘벼슬아치’들도 마찬가지다. 검찰 경찰 행정 교육 등 모든 공직을 망라해 구린내를 풍기는데,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당장 이틀 후 치러지는 지방선거판에도 마찬가지다. 대충 훑어봐도 자격 미달인 이들이 설치는 모습이 참으로 뻔뻔스럽다. 세금 한 푼 안 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군대 안 간 이들은 어찌 그리 많은지. 거기다 크고 작은 전과자들은 또 무슨 영문인가 싶다. 그들이 가당찮은 공약들을 마구 내놓는다.

집단으로 뻔뻔한 이들도 있다. 소위 귀족노조를 보자. 고액 연봉으로 국민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걸핏하면 단체행동을 벌인다.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으로 회생한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어떤가. 과도한 보수와 복지 혜택을 누리면서도 앓는 소리를 해댄다.

이런 가운데 뻔뻔함의 극치가 나타났다. 이 땅의 북한 추종세력이다. 친북이면 앞서가고, 종북이면 양심적이라고 여기는 이들 말이다. 이들은 지금 천안함 공격의 명백한 증거 앞에서도 조작극이라며 어깃장을 부리는 북한 정권을 두둔·옹호하고 있다. 참 뻔뻔스럽다.

이까지도 좋다. 원래 그렇다고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성직자와 교회가 보여주는 뻔뻔함에는 참으로 난감해진다. 기사에 불만을 품은 한 목사가 기자를 폭행하고도 도리어 자신이 당했다고 덤비니 실색할 일이다. 교단 분란의 중심에 서 있는 목사와 추종세력은 조금만 기사가 마음에 안 들면 폭언과 협박을 일삼는다. 부산의 한 교회는 객관적으로 가해자임에도 이웃집과의 분쟁을 몇 년째 끌어가고 있다.

이젠 진짜 중요한 대목이다. 나 자신은 어떤지 돌아보는 것이다.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허물을 갖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는 나 자신을 본다.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태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다윗도 자신의 치부를 알고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해 달라고 간구했는데, 오늘의 이 세태를 어쩌나. 어떻게 해야 비양심적이고 부도덕한 짓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들을 깨우쳐 줄 것인가.

역시 답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뻔뻔스러움을 털어내게 된다. 그분은 거듭 돌이키게 하고 회개하도록 재촉한다. 영적인 부담으로 부끄러움을 알게 한다. 그분은 그 일에 탁월하신 분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제자가 부끄러움을 깨닫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이중성의 표본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까지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는 한마디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주님이신 그분만이 할 수 있다. “주님, 저희로 부끄러움을 알고 뻔뻔하지 않게 해주소서.”

정수익 종교부장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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