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참전 中인민군 北 철군은  중·소 갈등의 산물” 기사의 사진

북한을 돕기 위해 6·25에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철수는 김일성 주석의 연안파 숙청과 중·소 갈등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종철 경상대 교수가 8일 저우언라이(朱恩來) 총리 연보(1997), 천이(陣毅) 외교부장 연보(1995)와 중국 외교문서 등을 분석한 결과, 마오쩌둥(毛澤東)은 1956년 9월 박헌영 북한 부주석의 사형 등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제기했지만 이듬해 11월 중·소 갈등이 벌어지자 인민지원군의 철군을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55년 10월까지 20만명이 넘는 인민지원군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55년 말까지 5개 군단과 후방병참부대를 포함해 총 25만명의 인민지원군은 잔류시켰다.

56년 9월 18일 마오쩌둥과 소련의 아나스타스 미코얀 부총리는 베이징에서 만나 김일성이 남로당계인 박헌영과 연안계인 박일우, 방호산을 숙청한 데 대해 강하게 비난했다.

중·소 양국은 같은 달 북한의 ‘종파투쟁’에 개입하기 위해 미코얀과 펑더화이(彭德懷)를 대표로 하는 공동대표단을 평양에 보냈다.

하지만 9월 폴란드, 10월 헝가리 에서 반소(反蘇) 항쟁이 발생했고 소련군은 이를 강제 진압했다. 중국은 동유럽 사태를 놓고 소련과 이견을 보였고, 김일성은 이 틈을 타 대대적인 종파 투쟁을 전개했다. 57년 11월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에서 김일성을 다시 만났다. 중·소 갈등으로 입장이 다급해진 마오쩌둥은 종파사건 개입 문제의 해결을 원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인민지원군의 철군을 요구했다.

58년 2월 저우언라이가 평양을 방문해 철군 협상을 진행했고, 인민지원군은 같은 해 10월 25일까지 완전 철군했다. 김일성은 철군이 끝나기도 전에 인민군 내 연안계와 소련계 지휘관 수백 명을 숙청했다.

2007년 북·중 관계를 주제로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박 교수는 “마오쩌둥은 중·소 갈등 속에서 인민지원군의 명예로운 철군을 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종파투쟁에 간섭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안의근 기자 pr4p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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