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이영미] 상상력이 부족했다 기사의 사진

6·2 지방선거전이 개막도 하기 전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5월 23일) 한 달 전부터 출판가 키워드는 ‘노무현’이었다. 관련 책이 쏟아지고, 나오는 족족 팔렸다. 최고 베스트셀러가 된 사후 자서전 ‘운명이다’는 두 달도 안돼 14만부가 팔렸다. 극장가에서야 대박 기준이 ‘1000만 관객’이지만 책은 다르다. 소설도 아닌 자서전이 그 정도 팔렸다면 놀랄 일이다. 더 신기한 건 고요한 세상이었다. 추모는 예상보다 차분했다. 다급한 정치인들이 들쑤셔도 선거판에 노풍(盧風)이 불 낌새는 없었다. 세상은 평온하고, 뜨거운 건 오직 책뿐인 듯했다.

정치학 교수에게 서점가 ‘노무현 현상’에 대해 물었다. 그는 책을 이념의 비무장지대(DMZ)라고 해석했다. 보수와 진보가 인정하는 불가침의 평화구역, 그게 책이라는 얘기다.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책을 쓰고 읽는 게 가장 온건한 발언 방식이기 때문에” 책을 선택했다. 장외로 나가면 보수의 공격이 기다릴 터였다. 보수도 책까지는 양해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로 고독한 행위다. 예외도 있지만 본질에서 독서는 혼자 하는 일이다. 하나의 책을 여럿이 둘러앉아 본다 해도 마찬가지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독서는 ‘책과 나’ 둘 사이의 개별적 사건이 된다. 게다가 책은 살과 피가 부딪는 현실이 아니다.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기호의 세계를 고독하게 즐기는 것. 그게 책읽기다. 독서의 이런 특성을 고려하면 ‘책이 DMZ’라는 해석은 합리적이다. 장외로 뛰어나간 것도 아니었다. 전직 대통령을 지적으로 이해하겠다는데 정치적 잣대를 들이댈 이유는 없었다.

6·2 지방선거의 봉인이 풀렸다. 결과는 한나라당의 참패였다. 이런 결과를 예상했는가. 몰랐다고 하는 게 정직하겠다. 알았으되 입을 다물거나, 눈치 채고 외쳤으나 힘이 미약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에게 결과는 정말 뜻밖이었다. 무지에는 좌우 이념 차이도 없는 듯했다. 나만 몰랐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노무현과 책을 다시 떠올렸다. 놓친 신호 가운데 출판가 노무현 바람이 포함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현실 도피의 소극적 행위로 치부했던 책읽기. 그 안에 꽁꽁 숨은 이야기 말이다.

서거 1주기가 지나고 ‘운명이다’는 종합 베스트 1위에서 내려왔다. 잦아든 바람 속에서 메시지는 더 선명해졌다. 대형서점 정치·사회 분야 10위권을 보면 아직도 절반 이상이 노 전 대통령 관련이다. 내용은 추모라기보다는 탐구에 가까웠다. 대한민국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어디쯤 서 있는가? 진보의 미래는? 우리는 어떤 꿈을 꾸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책이 묻고 답하는 내용들이다.

책이 내놓은 답에 누가, 얼마나 동의하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찬성보다 중요한 건 노풍으로 상징되는 진보세력이 탐색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분명하게 반응하고 있다. 책 판매고가 그걸 증명한다. 그렇다면 반대편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가. 적어도 책세상에서 보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진로를 묻는 이도, 답을 내놓는 논객도 없다. 미래 담론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게 얼마나 치명적 직무유기인지 아직 배우지 못했다면 다음 선거가 가르쳐줄 것이다.

소설가 박민규는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라고 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외친 이들이 굴복한 것은 당대의 현실이었다. 2010년 6월 2일 대한민국 유권자에게 필요한 건 박민규가 말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 와 같은”(‘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상상력이었다. 현실은 원래 그런 거야, 에 지지 않고 꿈꾸기. 서점가 노풍이 뽐낸 것도 그런 상상력이었다.

한국의 보수가 게으르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부족한 덕목은 근면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시장과 도지사를 뽑는데 “열심히 나라를 지키겠다”는 언어는 얼마나 수세적인가. 아무래도 상상만은 자신 없다면, 그때는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이영미 특집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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