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옛그림] (25) 구름 속에 숨은 울분 기사의 사진

얼른 보면 무슨 그림인지 모른다. 넘실거리는 파도인가, 노후 차량이 내뿜는 매연인가. 둘 다 아니다. 소용돌이치는 먹장구름이다. 세상에, 거세게 휘감기는 구름덩어리로 화면 온 곳을 다 채우다니, 조선 그림에 이런 장면은 일찍이 없었다.

기법 또한 별나다. 전후(戰後) 추상표현주의 작가 잭슨 폴록이 선보인 드리핑(물감 흘리기)을 연상시킨다. 재빠르게 붓을 놀린 품새하며 신명나게 먹물을 짓이겨 놓은 꼴이 형상보다는 행위에 방점이 찍힌 액션 페인팅 같다. 18세기 조선에 20세기 기법이라니,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하지만 어떤가, 착안과 구성이 현대작가 뺨치지 않는가.

먹구름을 그린 화가는 짐짓 딴소리 한다. 그림에 이렇게 적었다. ‘…시를 생각했는데 술 취해 쓰려다 구름뭉치가 되었소.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저 웃음거리외다.’ 시를 쓰려고 맘먹었는데 술김에 구름이 되어버렸다? 변명인즉 구름 잡는 소리다. 제 아무리 술 핑계를 댄들 저 흉흉한 구름은 화가의 숨겨진 속내가 분명하다. 울혈이 지지 않고서야 저런 그림 나올 턱이 없다.

화가는 문자속 깊기로 유명한 이인상이다. 완산 이씨 번듯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출 신분에 묶여 겨우 고을 원님 자리를 맴돈 비운의 선비다.

그는 말했다. “세상이 혼탁해서 나를 알아주지 못함이여, 잃고 얻는 것이 아침저녁에 달렸구나.” 우레와 벼락이 치고 세찬 장맛비가 금방 쏟아질 것 같은 그림은 불우했던 그의 일생을 대변한다. 그림이 인생이고 인생이 그림이란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손철주(미술칼럼니스트·학고재 주간)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