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성기철] 법조인 출신 국회의장 기사의 사진

1988년 초, 그는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2월 말 검찰 정기인사에서 운이 닿으면 총장에 오를 수도 있는 위치였다. 그즈음 13대 총선(4월 26일)에 출마하라는 여권 핵심부의 특명이 떨어졌다. 망설임이 없지 않았지만 집권 민정당의 공천을 받아 고향인 경남 남해·하동 선거구에 입후보했다. 부산·경남지역에서 YS(김영삼 전 대통령,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바람이 거세게 불었지만 그는 어렵잖게 배지를 달았다. 18대 국회 후반기 입법부 수장에 오른 박희태 국회의장의 정치입문 얘기다.

고향에서 내리 5선을 한 그는 2년 전 18대 총선에선 공천을 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 경남 양산 재선거에서 당선돼 6선 의원으로 부활했다.

국회에 법치 확립할 수 있는 기회

박 의장은 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61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이후 27년간 법을 다뤘다. 법학박사이기도 하고 잠시나마 법무장관까지 지냈다. 정부 수립 후 무려 20명의 국회의장이 탄생했지만 법조인 출신은 그가 처음이다. 법을 만드는 국민대표 기관의 수장에 법조인 출신이 들어섰으니 기대해 봄 직하지 않은가.

위법과 탈법이 난무하는 국회에 법치를 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는 의장 당선인사 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우리 국회는 ‘법대로의 국회’가 되어야 합니다. 법을 잘 만들 뿐만 아니라 법을 잘 지키는 국회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만든 법을 우리 스스로 짓밟는다면 누가 법을 지키겠습니까.”

법조인은 직업상 다소 딱딱한 성정(性情)을 갖고 있다.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 그것 때문에 대성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박 의장은 남다른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 아마 타고난 것이리라.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능히 제압할 수 있음)이 그의 생활신조다. 4년 3개월간 정당의 입노릇을 하면서 유능한 대변인이란 소릴 많이 들었다. 촌철살인의 유머와 위트는 그의 특장이었다. 여당과 야당 원내총무, 국회부의장을 거쳤으며, 여당 대표직을 원만하게 수행하기도 했다. 이전투구 정치권의 한복판에서 20년 이상 일했음에도 여야 막론하고 척진 사람이 없다. 좋게 평가하자면 정치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겠다.

이처럼 박 의장이 법조인 이력과 정치력을 겸비하고 있지만 그의 어깨는 꽤 무거워 보인다. 여의도에 변화의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국회다운 국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사실 18대 전반기 국회는 낙제점이었다. 최장의 공전과 최악의 폭력이 국민을 실망시켰다. 국회 환경은 후반기라고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과반 다수당인 한나라당은 다수결 원칙을 내세워 변함없이 ‘법대로’를 주장할 것이고, 야당은 이에 맞서 사사건건 협상을 통한 합의처리를 요구할 게 뻔하다. 여야의 김무성, 박지원 원내대표가 정치력을 갖추고 있지만 당리당략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박 의장의 조정능력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장이 정치적 중립을 철저하게 지키는 일이다. 의장이 중립적 국회 운영을 외면할 경우 파행은 불가피하다. 사실 의장의 정치적 중립은 2002년에 이미 법으로 제도화됐다. 의장직을 보유하는 동안 당적을 이탈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후 국회의장들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정당을 편들기 일쑤였다. 의장 퇴임 후 돌아갈 때를 생각해서일 것이다.

19대 총선 미련 버리고 소신 펴길

박 의장의 경우 2007년 ‘이명박 대선후보 경선 선대위원장’을 지낸 것이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그것 때문에 청와대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 의장이 마음먹기 나름이다. 박 의장은 청와대 낙점을 받아 의장이 된 게 아니다. 한나라당에서 자연스럽게 의장 후보로 의견이 모아졌고, 국회 본회의에서 당당하게 선출되지 않았는가.

대권 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희를 넘긴 나이다. 19대 총선에 대한 미련만 버리면 얼마든지 소신을 펼 수 있다고 본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세종시 수정안의 국회 처리 향방이 박 의장의 2년 장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성기철 편집국 부국장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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