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인사이드-정철훈] 未堂과 6·25 기사의 사진

미당 서정주가 신묘한 기억의 소유자임은 그가 남긴 ‘미당 자서전’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기억의 첫 꼭지는 두 살이나 세 살 적 어느 여름 낮의 사랑방을 맴돈다.

“사랑방에서 어머니가 아래를 벗은 나를 안고 내 사타구니에 부채질하고 계시고, 방안에는 부인들이 그득히 둘러앉아, 그중에 깅만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한 부인이 내 사타구니에 있는 고추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뭐라고 했다. ‘워마, 애기 꼬치에서도 땀내가 나네.’”

미당은 깅만이 어머니라는 부인을 ‘라파엘의 후광을 쓴 성모의 눈썹 같은,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눈썹’을 지닌 이로 기억한다. 그때는 깅만이 어머니뿐만 아니라 그 사랑방에 모여든 모든 어머니들의 머리에도 후광이란 게 둘러져 있던 시대였음은 자서전에 조목조목 열거되어 있다.

비록 일제 때라 해도 질마재처럼 일제의 손을 타지 않은 우리 전통의 얼개로만 후광을 발하는 민족 부락이 재 너머 산촌이나 둑 너머 강촌에 남아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공동체가 6·25를 만나 아주 망가져 버린 것이다. 산하만이 아니라 그 산하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아주 깨져버려 정신분열증을 평생 앓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질마재 이야기로 ‘자서전’을 발화한 미당은 종장에 이르러 6·25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전쟁의 광기는 시인의 정신을 무참히 황폐화시켰던 것이다. 홍신선 시인에 따르면 미당은 동국대 교수로 있던 1960년대 말 제자들과 명동을 걷다가 갑자기 전봇대를 얼싸안고 몇 차례고 똑똑 무슨 노크 소리하듯 두드렸다. 제자들은 미당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6·25 전쟁의 충격 때문에 미당이 하늘에서 오는 무전 같은 걸 듣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전봇대는 이 이상한 가역반응의 매개체였다.

미당 자신의 회고는 이렇다. “나는 6·25 사변 이래 늘 내 의식에 직접 접촉해 와서 치열한 공격과 협박을 퍼부어온 정체불명의 공중의 소리 속에 끊임없는 불안을 겪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무슨 전파에 실어보내는 듯한 공중의 소리는, 대구의 병원에서 나한테 ‘바로 이 집 뒤에 지프차가 있으니 와서 타고 인민군 사령부로 오라’고 권하다가 거절하자 나를 무척은 추켜올려 찬양한 뒤에도, 이어서 부산행의 열차 속에서나 부산에 도착한 뒤나 여전히 나를 놓지 않고 다시 시험하고 공격해 댔다.”

‘공중의 소리’란 다름 아닌 환청이겠으나 미당의 경우 말처럼 단순한 환청은 아니었다. 거기엔 일제와 6·25라는 역사적 파란을 겪으면서 굴절되고 만 시청각적 인상기와 주·객관을 미처 구분하지 못하는 허위 감각, 환각, 망상 등의 증세가 복합되어 있는 것이다.

올해로 미당 서거 10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문학적 이정표에 더욱 확장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다. 동국대 측은 지난해 미당의 동생 서정태(87)옹을 질마재로 찾아가 ‘형님의 추억’을 동영상으로 채록했는가 하면 미국에 있는 미당의 아들들을 비롯한 생존 가족과 친인척, 문단 원로들의 증언도 기록할 계획이라고 한다. 문단 일각에서 ‘미당 평전’ 집필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한마디 거들자면 이러한 움직임이 자칫 미당 문학의 적자(嫡子)를 세우는 데 이용되거나 미당 문학의 신화화라는 목적으로 덧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당의 내면은 6·25를 겪으면서 촉발된 정신적 교란과 신경 쇠약으로 끊임없이 분열한다. 다행인 것은 미당이 자서전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자서전은 어떤 평전보다 더 풍부하고 비옥한 자기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기왕에 미당 다시 읽기를 시도할 바에야 차라리 그에 대한 문학적 환상을 전복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6·25라는 시대적 광기 속에서 부서지고 만 한 인간의 절규를 통해 개인의 내면과 세상의 내면을 일치시키려 했던 시인의 꿈을 드러내는 것이 제자와 후학들의 일이 아닌지 묻게 된다.

정철훈문화부장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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