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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김기석] 일상, 그 마음의 닻

[삶의 향기-김기석] 일상, 그 마음의 닻 기사의 사진

언제부터인가 직장에서 돌아온 딸은 마을버스 정류장 계단 아래에서 살고 있는 검둥이 개의 안부를 제일 먼저 묻곤 한다. 녀석은 늘 심심하다. 그래서 가끔은 주위를 선회하는 파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제 밥그릇을 넘보는 고양이를 응징하기 위해 꼬리를 바짝 세우고 기세를 올리다가 목줄에 걸려 비틀거리기도 한다. 울적한 표정으로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가끔 그 옆을 지나치다가 녀석의 집을 기웃거리는 것은 딸과의 흐뭇한 대화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저녁 뉴스가 끝날 무렵 일기예보 시간이 되면 가족들이 일제히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든다. 기상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삶의 한 풍경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의 기상이 어떠할지 알지 못한다. 기상 캐스터의 옷차림과 구두에 대한 품평회를 하느라 예보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일 날씨 어떻대?”라고 물으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 뿐이다.

크고 의미 있는 일만 소중할까

공동주택에 사는 터라 엘리베이터에서 이웃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나면 침묵 모드로 돌입할 때가 많다. 그 어색한 침묵이라니. 그런데 같은 통로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 남자 아이는 호기심이 많다. 그 아이는 주저 없이 말을 건다. “아저씨, 10층에 살지요?” “아니, 13층.” “왜요?” 그 애의 철학적인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 어쩌다 내 손에 간식거리가 담긴 봉투라도 들려있으면 아이는 봉투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맛있겠다”를 연발한다.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퇴근 길에 꼭 마주치는 분들이 있다. 늙수그레한 학교 경비 아저씨는 먼빛으로라도 내가 보이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보낸다. 송구스러울 정도의 각도다. 나 또한 이제 아저씨를 보면 내 편에서 먼저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다. 기사식당 앞에서 구두를 닦는 아저씨는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흘낏 보고는 즉시 시선을 내려 구두를 바라본다. 그분의 시선은 심지어 내게 죄의식조차 불러일으킨다. ‘무슨 바쁜 일이 있다고 그렇게 무심히 지나쳐’라며 나를 꾸짖는 듯하다. 마음 한가로운 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구두를 핑계로 두런두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별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사를 늘어놓는 까닭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 우리 삶의 풍경을 이룰 뿐만 아니라, 삶의 지속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혹은 풍경들은 우리 내면에 일종의 귀속감정을 창조하고, 또 마음의 습속을 만들어낸다. 반복과 지속을 통해 우리 몸과 마음에 시나브로 각인된 것들 속에 머물 때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반면 낯선 것과 대면할 때는 불안을 느낀다. 물론 그 불안함은 삶의 지평을 넓히라는 초대다.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고여 있는 장소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느긋한 평온은 언감생심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공사 중이다. 어딜 가도 공사장의 소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인가? 우리 마음도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처럼 단속적으로 흔들린다. 고요함과 침묵의 사치는 허용되지 않는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면서도 마음의 헛헛증이 가시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소한 것들 속에 삶 담겼다

크고 의미 있는 일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작고 사소한 일일망정 마음을 담아 한다면, 그것은 영원과 우리를 이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될 수 있다. 일상을 정성스럽게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덧정 없이 떠도는 우리 마음을 지키는 닻이다. 일에 짓눌려 답답할 때 잠시 밖에 나가 눈인사만 나누었던 이웃들에게 무람없이 말을 건네 보면 어떨까? 그 뜻밖의 마주침이 우리 삶에 시원한 바람을 불어넣을지 누가 알겠는가?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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