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식물 이야기] 나라꽃 무궁화가 겪은 수난 기사의 사진

정치적 이유로 식물을 탄압한 예는 아마 인류 역사를 통틀어 무궁화가 유일하지 싶다. 일제 강점기에 그랬다. 무궁화를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여긴다는 이유였다.



특히 시인 남궁억은 무궁화를 널리 보급한 대표적 인물이다. 강원도 홍천의 보리울학교 교사였던 그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은 금세 떨어지지만, 무궁화는 오래도록 피어나는 꽃이라며 우리 역사가 면면히 흐를 것임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일본인 경찰들은 학교 안의 무궁화 8만 그루를 불에 태웠고, 남궁억은 옥살이까지 했다.

그 뒤로도 일본인들의 무궁화 탄압은 잔인하게 이어졌다. 한반도 지도에 무궁화를 그려 넣는 건 물론이고, 신문의 상징이나 학생의 교복과 모자에도 무궁화를 넣지 못하게 했다.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무궁화 사랑은 그치지 않았다. 남강 이승훈도 자신이 설립한 오산학교에 무궁화동산을 조성, 민족정기를 고취하고자 했다. 이를 철거하도록 종용한 지시를 선선히 따르지 않자, 일제는 무궁화를 불에 태워 없앴다. 뿐만 아니라 무궁화는 보기만 해도 눈에 핏발이 서게 하는 ‘눈에피꽃’이라거나, 닿기만 해도 부스럼이 생기는 ‘부스럼꽃’이라는 거짓 정보를 퍼뜨리기도 했다. 식물에 정치색을 덧씌운 터무니없는 난센스다.

선사시대 때부터 우리 곁에서 자라온 무궁화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은 탄압만으로 막을 수 있는 일시적 충동적 성격의 사랑은 결코 아니었다. 중국 고대의 지리서인 ‘산해경’에는 우리나라를 ‘무궁화가 많은 나라’라 했으며, 그밖에 여러 기록에서도 우리나라를 흔히 ‘근역(槿域)’ 즉 ‘무궁화의 나라’로 표시했다. 현존하는 사료 가운데에는 고려시대에 중국으로 보내는 국서(國書)에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쓴 것이 최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1896년 독립문 정초식(定礎式) 때에 우리나라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 한 것이 공식적 기록이다. 그야말로 민족의 삶과 궤를 같이 한 나무임에 틀림없다. 일제가 물러가자 자연스레 ‘나라꽃’으로 지정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광복절 즈음, 여러 기념행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무궁화의 수난이 민족의 애환처럼 애틋하게 다가온다. 볼수록 아름다운 꽃임은 물론이고, 끊임없이 꽃을 피우며, 해충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이어가는 생명력 또한 민족의 성정을 빼닮았다. 우리의 나라꽃으로 이보다 더 알맞춤한 꽃이 없지 싶다.

천리포수목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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