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유현종 (5) 가정형편에 적성 무시하고 공고 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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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중독성이 강해서 한번 그 세계에 빠지면 작가가 되거나 시인이 되거나 되지 않아도 평생 앓게 되는 열병이다. 중학교 때 문학을 함께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훗날 그는 사법시험을 봐서 시인보다 더 훌륭한 검사가 되었다. 검사시절 시간이 나면 날더러 점심 같이하자는 전화를 걸어주곤 했다. 그래서 먼저 그의 사무실로 들르게 된다. 잘나가는 검사님의 테이블에 놓인 책을 보면 반드시 시집 한두 권 그리고 문학잡지가 놓여 있어 날 놀라게 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아직도 그는 문학의 열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무실을 나가기 전 그는 반드시 책상 서랍을 뒤져서 최근에 습작했다는 시 몇 편을 가지고 와 봐 달라 한다. 작가나 시인이 되려면 문단에서 인정하는 ‘라이선스’를 받아야 한다. 그게 어렵다. 안 되면 평생 습작을 하게 된다. 그 친구는 물론 지금은 은퇴하여 집에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은퇴하지 않고 있다.

중학교 때 이미 문학에 중독이 되어 인문계고를 가야 한다는 나에게 집안에서는 공고 전기과를 가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결핵을 심하게 앓고 있어서였다.

3년 동안 요양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치료비로 가산마저 탕진되었다. 날더러 인문계고에 가지 말고 공업학교에 가라 한 것은 졸업하면 취직하여 식구들 먹여 살리고 아버지 치료비도 대야 하니까 꼭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공업학교 전기과로 진학했다. 전교생이 아침조회를 하고 교가 제창을 하게 되면 전교생이 부르는 교가의 음정은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음악시간이 없는 데다 교가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없기 때문이었다.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견디고 다니는데 엄청난 불행이 닥쳐왔다. 산골 고향 숙부집에서 요양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남의 집 산자락을 빌려 아버지 시신을 묻고 돌아서는데 정말로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린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떡하라고 돌아가십니까?’하고 울었는데 돌아가신 데에 대한 슬픔보다는 내일부터 어떻게 남겨진 식구들이 굶지 않고 살아나갈 수가 있느냐, 정말로 대책이 없다는 눈물을 한없이 쏟았다.

도와줄 만한 친지나 친척도 없었다. 있다 해도 투병하는 동안 빚을 얻어 쓴 사람들뿐이었다. 빚 때문에 초가삼간도 넘어가게 되었다.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아버지가 누워있을 때는 그나마 살아 계시니 언젠가는 돈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빚쟁이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일제히 받으려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우리 식구들은 거지처럼 되어 사글세 단칸방으로 옮겼다. 나는 사남매의 장남이었다. 내 밑에 여동생이 둘이고 남동생이 막내였다. 둘째만 빼고는 모두 초등학교 학생이었다. 나가서 생활비를 벌어 올 만한 식구가 없었다.

어머니는 살림만 하시며 남편 병구완만 하던 분이라 전혀 생활력이 없었다. 하지만 굶을 수는 없었다. 동네에는 극빈자 취로사업이 있었다. 개천을 정리한다든가 장마에 파내려간 도로를 보수하는 일 등을 시키고 최소한의 취로비를 주었다.

주로 어머니가 삽을 들고 나갔지만 나도 한 주일에 두세 번 나갔다. 무단결석을 한 것이다. 나는 어른의 절반 값밖에는 못 받았다. ‘왼일꾼’이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정리=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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