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기다 겐이치] 한국강제병합 100년을 뛰어넘어 기사의 사진

‘한국병합조약’은 1910년 8월 22일 한국의 강한 반발을 억누르고 비공개로 조인되어 같은 달 29일 공표되었다. 그런데 그간 일본 정부는 병합조약이 한·일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의지로 맺어졌다고 주장해 왔다.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는 지난 10일 ‘한국병합 100년’이란 제목의 담화를 발표하면서 병합조약이 당시 한국인들의 의지에 반(反)하여 체결됐다고 밝혀 조약의 강제성을 처음 공식 거론했다. 일본 정부가 이전보다 조금 전향적인 입장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담화에 조약이 무효라는 주장은 없었다. 간 총리 담화의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한·일 지식인 200여명이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구상하고 지난 5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와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공동으로 발표한 주장과도 대치된다.

간 日총리 담화 한계 역력

한국병합 자체는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의 격렬한 항의를 일본군대가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 필자도 일본 측 104명의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서 병합조약은 원천 무효라고 본다.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의지는 1868년 메이지정부 등장과 함께 존재했다. 그해 12월 19일 일본은 새 정부 탄생을 알리는 국서를 조선에 전했다. 그런데 국서의 형식은 일본 천황을 황제로 지칭하는 등 정한(征韓)의 의도를 담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이 한목소리로 병합조약 원천 무효를 주장했지만 그것은 양국의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 문제에 무관심하다.

패전 이후 일본이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달려온 탓이 크다. 한국은 1945년 8월 해방을 맞자마자 분단되고 전쟁으로 치달았으나 그 사이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으면서 과거에 대한 그 어떤 반성도 없이 패전의 폐허에서 벗어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1965년 비로소 일본은 한·일 기본조약 등을 맺지만 이것은 대부분 정부 차원의 배상에 불과했다.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는 물론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 사할린 잔류자,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 등에 대한 사죄와 보상은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후 한국 시민들의 끈질긴 비판을 낳았고 마찬가지로 일본 시민에게도 일본의 과거사 책임규명이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번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나오게 된 것도 한국 시민들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에 촉발된 바 크다.

서로 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그러나 간 총리 담화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에 대해 전혀 거론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는 개인배상에 대해 여전히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한·일 양국 시민들이 함께 주장하고 풀어가야 할 일이 앞으로도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는 22일 도쿄에서는 ‘한일시민공동선언대회’가 열린다. 다채로운 프로그램과 함께 ‘공동선언’과 ‘행동계획’이 발표될 예정이다. 지나온 굴곡의 100년을 양국이 진정으로 소통하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교제를 넓혀갈 수 있는 계획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필자가 관계하고 있으며 올해로 창립 121년째를 맞은 야마나시에이와(山梨英和)대학의 예를 보면 대학원생을 포함해 1000여명의 학생들 가운데 200여명이 한국과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다. 작은 대학이지만 동아시아 출신이 많은 것은 역내의 아픈 과거를 교훈 삼아 더불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자는 취지 덕분이다.

아픈 역사를 깊이 인식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새로운 우호관계 구축도 절실하다. 양국의 새로운 100년을 위해서도 서로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더욱 많이 만들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다 겐이치(번역= 조용래 논설위원)

◇기다 겐이치(木田獻一)는 일본을 대표하는 구약성서신학자로 릿쿄대 교수를 거쳐 현재 야마나시에이와대학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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